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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7
한자 群山倉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87년연표보기 - 군산창 설치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군산창 폐지
관할 지역 군산창 - 전라북도 군산시 금동 군산 서 초등학교지도보기 일대

[정의]

조선 전기 군산포에 설치된 조창.

[개설]

군산창은 1487년(성종 18)에 용안 득성창의 기능을 일부 나누어 군산포에 설치한 조창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옥구현조에 따르면 군산창은 서천포와 비교해 제읍 전세(諸邑田稅)를 거두어 바로 배에 싣고 출항하기가 편리하므로 용안 득성창의 기능을 분리해 설치하였다고 한다.

[관련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487년(선조 18)에 함열의 덕성창(德成倉)을 용안으로 옮기고 이름을 득성창(得成倉)으로 고쳤는데, 뒤에 또 옥구의 군산창(群山倉)으로 옮겼다. 1512년(중종 7)에 나주 영산창은 수로(水路)가 험하여 많이 전복되고 패몰(敗沒)되므로, 거기서 거두던 전세를 영광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고 또 법성창에서 거두던 전세를 옥구의 군산창으로 나누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선조 30) 『선조실록』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군산창의 전세미(田稅米)가 일본군에게 갑자기 탈취될 것을 우려하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군산창은 군산포에 자리하고 있었다. 군산창의 조운에 관계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옥구현조에는 “군산창군산진 곁에 있는데 성종 18년 용안 득성창을 나누어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적고 있어 처음 군산창에 조창이 설치 된 시기를 성종 18년으로 적고 있다. 또한 전라도 관찰사 남곤(南袞)은 “서천포는 해구에 자리하나 군산포는 다소 내지에 위치하고 있다. 제읍 전세(諸邑田稅)를 거두어 바로 배에 싣고 출항하여 오식도에 이르렀다가 상경하면 되므로 훨씬 편리하다. 그러나 군산전은 세미를 포구까지 날라야 하는데 득성창 보다 다소 멀고 조항 출입이 불편하므로 부득이 쌀을 포구에 저 나르자면 만조 시에는 침수되고 진 뻘에 빠질 우려가 있다”라고 하여 군산포가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그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규모가 큰 조함의 출입이 어렵다는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득성창의 역할을 나누어 조창의 역할을 하던 군산창은 1512년(중종 7)년에 용안 득성창의 기능을 모두 옮겨 받고, 법성포에서 수납하던 흥덕·고부·정읍·부안 등의 조세마저 수납하는 호남 지역 조운 창고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군산창 주변의 용안·전주·임실·남원·임피·김제·장수·금구·운봉·익산·만경·여산·금산·진산·태인·옥구·진안·고산·무주·함열 등 덕성창이 원래 관할하던 고을과 새로 법성포창에서 이관한 흥덕·부안·고부·정읍 등 2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조운하였다.

그 뒤 인조 때 여산에 나암창(羅巖倉)을 설치하여 그 관할의 일부가 이관되고, 많은 고을에서 사선(私船)을 세내어 임운(賃運)하면서 17세기 중엽 이래로는 전주·옥구·진안·장수·금구·태인·임실 등 7개 고을의 세곡만을 조운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23척의 조선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세곡의 수납과 운송은 군산진 첨사가 책임지고 관리하였다.

군산창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속대전(續大典)』 기록에 의하면 “군산창에는 조함이 18척 조군이 816명이라고” 적고 있어 조군에 포함된 가족과 하급 관리 등 여타 인구와 일반 백성의 숫자까지 합하면 적어도 1,000~2,000여 명이 거주하는 해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산창은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1895년(고종 32) 성당창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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