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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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勞動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2년 - 군산노동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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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1년 4월 30일 - 군산노동회 해산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5월 - 군산노동회 1차 정기 총회 개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6월 11일 - 군산 인접 조합원들이 임금 인하 문제로 군산 노동 회장 조용관 구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8년 3월 16일 - 군산노동회와 노동 공제회 합병 논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9년 11월 11일 - 화물 취급 문제로 군산노동회와 군산 노동 공제회 노동자들 사이 난투극 발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7월 16일 - 군산노동회 간부 일본 경찰에 의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구속 |
성격 | 노동 운동 단체 |
설립자 | 조용관|김응배 |
[정의]
1922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설립된 노동 단체.
[개설]
군산에서 노동 운동 단체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1920년부터 나타났고, 1926년 6월 전라북도에 있던 62개의 노동 운동 단체 가운데 군산에 약 30여 개가 있었다. 이렇게 노동 운동 단체가 많았던 배경으로는 일제의 자본 축적을 위한 공장 신설과 일본인 경영의 기업들이 군산에 많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군산노동회는 1920년대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설립이 되었다. 설립과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설립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31년 일본 경찰에 의한 해산 종용 과정에서 ‘구개성상(九個星霜)’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점을 보면 1922년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용관(趙容寛)과 김응배(金應培)가 주체가 되어 설립되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물들이 운영에 참여하였다.
설립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한 해체 종용을 받기 전까지 군산노동회는 군산 지역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 자본가들에 의해 노동 문제가 민족 내부의 계급 모순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민족적 모순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전국적 노동자들의 합동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 할 때에 인적·경제적 원조를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군산노동회 설립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설립 목적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당시 발행되었던 신문 자료와 대표적 인물의 활동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군산노동회 창립에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 인물이 조용관이다. 그는 군산노동회가 창립되기 이전부터 군산 지역 사회 주의 운동 단체에서 활약을 하며, 일제 자본에 의해 발생되는 노동 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조용관은 김응배 등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인물들과 함께 노동자들의 권리 옹호, 환난상구(患難相求),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군산노동회를 설립하였다.
[변천]
군산노동회가 설립되었던 1920년대 군산은 군산노동회와 비슷한 성격의 단체 30여 개가 설립된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노동 운동과 민족 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조직화된 노동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1928년 3월 16일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는 군산노동회와 군산 노동 공제회(群山勞動共濟會)가 유사한 단체이기에 합병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후 두 단체의 활동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로 보아 두 단체의 합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산노동회는 노동자들의 권익 확보와 민족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동 운동·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군산 노동회의 이런 활동을 치안 유지법을 통해 감시·탄압하였고 1931년에는 사상이 불온한 단체라는 이유로 해산시켰다.
1928년 5월 9일 군산 노동 회관에서 제 6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참석 회원은 150명 정도이고 경과 보고와 예산·결산 안을 통과시켰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노동자 권익 보호와 노동 운동에서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띤 사건에 대한 후원과 원조를 주 업무로 진행하였다.
첫째,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군산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동 시장에서 노동권 확보를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군산노동회 회원들에게 객주의 화물 취급 업무를 제공해 주고 동시에 임금 차별의 폐해를 수정하고자 하였다. 즉, 일제 자본에 의해 노동 문제가 민족 내부의 계급 모순으로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민족 문제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 하였다.
둘째, 노동자들의 열약한 환경을 극복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1928년 3월 3일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협력 노동과 공평 분배를 실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다.
셋째, 1925년 4월 21일 예천 형평 분사 피습 사건(醴泉衡平分社 被襲事件)에 대한 진상 조사를 돕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원산 총파업 때에는 군산 노동회 회원이 모은 동정금을 파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보내 주었다.
[현황]
군산노동회의 집행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집행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집행 위원을 선출하여 집행 위원들 가운데 위원장을 선출하여 운영하는 집행 위원제로 운영이 되었다. 활동 기간 동안 위원장은 조용관 외의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1928년 5월 9일 군산 노동 회관에서 열린 제 6회 정기 총회에 따르면 당시 집행 위원의 구성은 위원장 조용관, 위원 유용택(兪龍澤)·이문찬(李文賛)·정해권(丁海權)·한성춘(韓成春)·최재선(崔載善)·한성칠(韓成七)·윤혁중(尹赫重)·김응배(金應培)·나순흥(羅順興)·이동화(李東和)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집행 위원은 주요 안건에 대해 회의를 통해 입장을 정리하여 처리하였다. 정기 총회 이외에 임시 총회·정기 대회 등의 다양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군산노동회의 정확한 회원 숫자를 알 수 없지만 활동을 하고 있는 시기에 100명~150명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아 창립부터 해산까지 100여 명 내외로 조직을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용관을 비롯한 장공욱, 김일수, 이인섭 등 군산노동회 회원들은 군산노동회 이외에 신간회 군산 지부 및 군산 지역 다른 사회 운동 단체에서도 중추적 인물로 활동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노동회는 설립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해산 명령을 받기 전까지 노동 문제에 있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 운동을 촉진하였다. 해산 이후에는 신간회 군산 지회 및 노동 운동 단체에 계속적으로 참여하여 군산 지역 노동자들의 권익 확보를 위한 노동 운동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