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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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유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개설]
군산청년회는 문화 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실력 양성, 문화 향상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야학회, 운동회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후 경신 구락부, 동광 청년회, 군산청년회가 한 단체로 합쳐지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었다.
군산청년회의 중심 인물인 김흥두는 1864년(고종 원년)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태어났으며 1900년경 군산에 이거하여 천일 상회 대표, 군산부 협의원 5차 연임, 군산 상공 회의소 의원 6차 연임, 교육계에 많은 원조를 하여 인재 양성에 공헌을 하였다. 김흥두는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이용해서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설립 목적]
군산 유지인 김흥두 외 여러 명의 발기로 조직되었고 창립 위원은 차현모, 이정○, 차주상, 최동길, 오기영 외에 20인이었으며,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변천]
군산청년회는 1922년 10월에 조직되고, 회장 신석우, 부회장 조중환, 총무 조양창, 교육 부장 고한윤, 체육 부장 김응배, 저축 부장 박승옥, 고문 이세환, 박용, 김흥두에 의해 1923년 2월 발기하였다. 그 후 1924년 7월 조용관, 김응배, 박용, 김희앙 등의 발기로 군산 경신 구락부, 군산청년회, 동광 청년회 등 3개 단체 합작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4년 8월 24일 군산 보통 학교에서 합작 총회를 개최하여 군산청년회라 칭하였다. 통합 후 군산 청년회가 활동하는 동안 일제의 단속이 강화되어 혁신 총회를 개최, 규약 수정안을 통과 시킨 후 1927년 3월 폐회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창립 후 공립 보통 학교 운동장에서 청년회 당원을 비롯한 관람객을 모아 대규모 축구 운동을 개최하였다. 또한 『조선 일보』가 군산청년회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었을 당시 바로 총회를 열어 반박 기사를 내고 『조선 일보』를 비매, 기자들과 교류를 금지하는 사항을 의결하는 등 빠른 대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극적 대응은 당시 청년회가 상당한 힘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924년 9월에는 조용관의 사회로 추도회가 개최되어 관동 대지진의 피해로 인해 희생된 동포를 위한 추도문을 낭독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고등 형사에게 압수당하였다. 그 밖에도 연쇄극 활사대를 조직하여 공연으로 동정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청년회는 1920년대 전후반기 군산의 문화 운동을 이끈 대표적 민족 운동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