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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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牛馬車組合同盟罷業 |
이칭/별칭 | 군산 하차 조합,군산 우차 조합,군산우마차조합,군산 하마차 조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일제 강점기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우마차조합원이 일으킨 화물 운반 거부 파업.
[개설]
군산우마차조합은 군산 우차 조합과 군산 하차 조합이 병합하여 명칭이 개칭된 단체로 군산 하마차 조합이라고도 불린다. 군산 하마차 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주요한 이유는 현실과 맞지 않은 낮은 수준의 임금이 문제였다. 군산우마차조합에서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 운송점 조합(群山運送店組合)에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요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운송점 조합의 고압적 태도에 의해 일방적으로 거부되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내걸고 동맹파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군산우마차조합 지도부는 협상과 교섭을 통해 파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파업을 통해 그동안 낮은 수준으로 책정되었던 화물 운반료에 수정을 가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화물 운반을 거부하며 군산 철도 노동회와 동맹파업까지 진행했다.
이에 대한 운송점 조합의 대응은 시간을 끌어가면서 자신들이 정한 최소한의 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부들을 임시로 고용하여 화물 운송에 투입하는 방법으로 파업에 대처하였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임시로 투입된 인부들에게 작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며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파업으로 인한 화물 운송의 차질을 피하기 위해 군산 상업 회의소와 군산 경찰서가 중심이 되어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군산 우마차 조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어 계속적으로 파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60명 이상이 경찰에 구속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 이후 군산과 인근 호남 평야는 대규모의 일본인 농장과 간척 농장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군산과 인근 호남 평야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은 군산에 집산되었고, 집산된 쌀들은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일본으로부터는 목재와 석재류 등이 들어오고 있었다.
1912년 호남선·군산선의 개통과 이후 신작로 개설은 군산에서 이·출입 되는 쌀, 가마니, 목재 등의 운송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사회 경제에 영향을 주었다. 철도 등 새로운 교통 수단의 개통은 보조 운송 기구로서 소 운송업의 발달을 필요로 하였다. 늘어나는 수화물의 증가는 운송점이 중심이 되어 유통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역과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운송점에서는 화물차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소나 말 등을 이용하여 화물을 운반하였다. 우차의 적재량은 140~160관(貫), 마차는 130~150관(貫)으로 400~600㎏ 정도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다. 1913년 군산에서 전주까지 우마차 1대 당 운송 화물 운임 요금은 5원~6원 50전 사이였다. 주로 단거리 수송에 이용되었다.
우마차를 사용하여 운반되는 화물은 다양한 종류가 있었는데, 운송 점주들은 화물에 따른 정확하고 납득할 만한 임금을 산정하지 않고 낮은 금액의 운반료를 산정하였다. 우마차 운송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빠른 시간 안에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화물 트럭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임금 수준은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마차로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 조건 확보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군산 우마차 조합이 결성되었다. 군산 우마차 조합에서는 파업 등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통해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고자 하였다.
[경과]
1926년 12월 19일 군산 하마차 조합원은 군산 운송점 조합(群山運送店組合)에 대해 화물 운반 임금을 올려주라는 요구서를 제출하였다. 운송점 조합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자 1927년 1월 13일 재차 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역시 강경하게 운송점 조합에서는 거부하였다. 이에 군산 하마차 조합원 200여명은 서로 결속하여 1927년 1월 14일 오전 8시부터 총동맹파업을 전개하였다. 군산 경찰서는 동맹파업의 선동자로 이종팔(李鍾八) 외 13명을 검거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운송점 조합에서는 군산 하마차 조합원들을 대신하여 마차와 점원들을 통해 화물을 운반하게 하였으나, 조합원들은 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면서 소동이 발생되었고 화물이 정체되는 상황이 초래 되었다.
[결과]
군산 상업 회의소와 군산 경찰서가 중심이 되어 군산 하마차 조합과 군산 운송점 조합 간의 해결책을 도모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 운반되는 화물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에 한해 임금을 올려 주는 안을 제시하였다. 군산 하마차 조합원은 이 의견에 반대를 하였고 운송점 조합은 1927년 1월 16일부터 전주에서 하물차를 하루 40원에 임대하여 화물을 운반하였다. 군산 하마차 조합의 파업에 군산 철도 노동회(群山鐵道勞働會)도 동맹파업을 실시하였으나 경찰의 구속으로 60여 명이 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중반 파업 양상은 개별 작업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서 노조가 지도 후원하거나 혹은 노조의 지도와 후원 아래 개별 작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이 분산적으로 동맹파업을 행하는 형태였다. 군산우마차조합의 파업 양태에서도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요구한 노동 문제는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 피지배 민중의 의식 각성과 사회 개조에 대한 변화를 일으키는데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군산우마차조합의 파업 활동을 통해 그들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직적인 규모를 갖추어 협상과 파업을 통해 성과를 끌어내고자 한 투쟁 방법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업이 전개되자 일제 경찰은 파업 참가자를 구속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제거하여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집단적 행동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