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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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惇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두헌 |
거주|이주지 | 고돈겸 거주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오식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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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입향조 |
성별 | 남 |
본관 | 제주 |
대표 경력 | 보문각 직학사|병부 상서|문하 시중 |
[정의]
고려 시대 군산 지역[옛 옥구현] 에 세거한 제주 고씨 입향조.
[개설]
고돈겸(高惇謙)은 12세기 중엽에 중앙의 고위 관리로 있다가 모함을 받고 현재의 군산시 오식도동[옛 옥구현]으로 유배되었으나 유배가 풀리지 않자 계속 거주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옥구에 터를 잡고 세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제주 고씨 문충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문충공’은 고돈겸의 현손 문충공 고경(高慶)이다. 곧, 고돈겸은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 문충공파의 입향조이다.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가계]
고돈겸은 탐라국 마지막 왕인 자견왕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고돈겸은 옥구(沃溝)에 세거하며 대성(大姓)을 이룬 제주 고씨(濟州高氏) 문충공파(文忠公派)의 입향조이다. 제주 고씨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보첩에는 고순겸(高淳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26년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태봉동에서 발견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아들 고형중(高瑩中)의 묘지명에는 고돈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돈겸은 과거에 합격하여 보문각 직학사, 병부상서,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다. 직언으로 용감하게 간언하다가 소인배들의 시기를 받았으며, 마침내 정인걸 등의 무고를 받고 군산의 오죽도[현재의 오식도동]에 유배되어 끝내 풀리지 못하고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돈겸이 옥구에 유배되어 후손들이 옥구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돈겸의 아들 고형중(高瑩中)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옥구현 인물 조에 수록되어 있는 점, 둘째 1926년에 발견된 아들 고형중의 묘지명에 고형중이 '전주부(全州府) 옥구현인(沃溝縣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 셋째 현손 고경(高慶)이 옥성군(玉成君)으로 봉군(封君)되었는데, 이는 고경의 고향이 옥구이기 때문이라는 점 등이다.
고돈겸이 옥구로 유배된 시기는 아들 고형중(高瑩中)[1131~1208]의 생몰 연도로 보아 12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된다. 고돈겸의 후손들은 옥구와 임피 지역의 여러 곳[옥구읍 옥정리, 옥구읍 어은리, 학당리, 임피면 월하리, 술산리, 서수리, 대야면 접산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면서 옥구와 임피의 대성(大姓)을 이루었다. 고려 시대에 후손들이 8세대 이상 옥구읍 한림동에 세거하였는데[아마도 고려 시대 말까지는 한림동에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려 시대에 아홉 명의 상서(尙書)와 열 두명의 한림(翰林) 학사(學士)를 배출하였다는 이유로 이들이 거주한 마을을 한림동(翰林洞)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해방 이후 후손들이 고돈겸의 옥구 입거 사실 및 후손들의 관직 진출 사실 등을 기록한 한림동 유허각비(翰林洞遺虛閣碑)를 군산시 옥구읍 한림동의 염의 서원 바로 앞에 건립하였다. 고돈겸(高惇謙)의 후손 중에 현손 고경(高慶)과 고경의 아들 고용현(高用賢)이 각각 문충공(文忠公)과 문영공(文英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옥구와 임피에 세거한 제주 고씨들은 자신들이 모두 문충공고경의 후손들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을 문충공파(文忠公派)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