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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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浩林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구호림은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 까지 일본 동경의 중앙 대학에 유학 중 고담용 등과 함께 고문 그룹을 조직하고 십여 차례에 걸친 모임을 통해 우리 민족의 단결심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논의하는 등 활동을 했다.
[활동 사항]
구호림은 1933년 3월 대야 공립 보통 학교(大野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3년 4월 경성 제일 공립 고등 보통 학교(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현 경기 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1938년 3월 경성 제일 공립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동경 중앙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1942년 졸업하였다.
구호림은 경성 제일 공립 고등 보통 학교 재학 당시부터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시작하였다. 동경 중앙 대학에 진학하자, 조선이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구호림은 1940년 6월 하순경 고담룡(高湛龍)·김운봉(金雲鳳) 등과 회합하여 조선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한민족의 단결심 양성, 자력 함양, 미국을 통한 독립운동 도모 등을 전개하기 위해 고문(高文)그룹을 조직하였다. 고문 그룹은 표면적으로 학술 연구와 상호 친목 단체로 위장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동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사를 유지하였다. 이들 고문 그룹은 조선 독립의 방법으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기본적으로 채택하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협의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 말경 구호림 등은 일본 정책에 편승하여 실력을 양성하며 자력(自力) 본위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할 것과 독립 후 통치 체제는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모방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후 1940년 11월 이들은 모임을 갖고 기념 촬영을 하면서 졸업 후 관계 혹은 재계로 진출하여 평생 독립을 목표로 헌신할 것을 협의하는 등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약 11회에 걸쳐 독립 쟁취 방법을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 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임시 취체법(臨時取締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