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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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炳瓚 |
이칭/별칭 | 중옥(中玉),돈헌(遯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종수 |
출생 시기/일시 | 1852년 - 임병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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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임병찬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 병마동 첨절제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임병찬 무성서원에서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임병찬 대마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임병찬 대마도 유배 해제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임병찬 독립 의군부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임병찬 거문도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916년 - 임병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임병찬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6년 - 태인 의병 거병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2년 - 대한 독립 의군부 창설 |
출생지 | 임병찬 출생지 - 전북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
활동지 | 임병찬 의병 창의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
묘소 | 임병찬 선생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회문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 독립 의군부 총대표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의병.
[개설]
1906년 2월에 의병장(義兵將)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태인(泰仁)의 무성 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추진하였다.
[가계]
임병찬은 1851년 2월 5일 전라북도 옥구군 상평리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이다.
[활동 사항]
임병찬은 1906년 2월에 의병장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전라북도 태인(泰仁)의 무성 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招募), 군량(軍糧) 및 병사 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洪州)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官穀)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陣容)을 정비하였다. 1906년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監禁)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 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 의군부 순무 대장에 임명되었다.
임병찬은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 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 독립 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 총리 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본의 한일 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 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본을 쫓아내려는 항일 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4년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임병찬은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1914년 6월 13일 거문도(巨文島)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임병찬의 저서로는 『돈헌 문집(遯軒文集)』과 대마도에 유배 되었던 시기에 기록한 『해외 일기(海外日記)』, 『대마도 일기(對馬島日記)』 등이 있다.
[묘소]
전라북도 순창군 회문산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