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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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亭秘訣-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집필자 | 이하범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정초에 『토정비결(土亭秘訣)』이라는 책을 통해 한 해의 운수를 알아보는 대표적인 점복 풍속.
[개설]
토정비결을 보는 방법은 백 단위인 상괘(上卦), 십 단위인 중괘(中卦), 일 단위인 하괘(下卦)를 합하여 세 자리수로 된 괘를 완성시켜 책에서 해당 숫자를 찾아보면 된다.
백 단위는 나이와 해당 년의 태세수(太歲數)를 합한 뒤 8로 나눈 나머지 숫자이며, 나머지가 없으면 8이다. 십 단위는 해당 년의 생월 날짜 수[큰 달은 30, 작은 달은 29]와 월건 수(月建數)를 합해 6으로 나눈 나머지 수, 일 단위는 생일수와 일진 수(日辰數)를 합한 뒤 3으로 나눈 나머지 수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세 단위의 숫자를 찾으면 그해의 전체 운수에 대한 개설이 나오고, 이어 월별풀이가 나온다. 특히 열두 달의 운세를 4언 3구의 시구로 풀이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은 ‘뜻밖에 귀인이 내방하여 길한 일이 있다’, ‘구설수가 있으니 입을 조심하라’, ‘봄바람에 얼음이 녹으니 봄을 만난 나무로다’ 등과 같이 주로 부귀·화복·구설·가정 등 개인의 길흉화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오행점(五行占)으로 한 해의 신수를 본다고 적혀 있어, 정초에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은 조선 후기부터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전까지 오행점·농점·윷점 등으로 한 해의 농사나 가정의 화목을 점치던 것에 비해, 조선 후기 민생의 곤궁이 심해지자 보다 개인적이고 세분된 예언을 희구하던 시대적 요청에 따라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전에는 주로 동네에서 한학을 공부한 어른들을 찾아 토정비결을 보았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거리에 토정비결을 봐주는 점복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근래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 토정비결도 성행하고 있다.
정초의 세시풍속에 유난히 점복적인 요소가 강하듯이 새해를 맞아 한 해에 대한 기대 심리와 놀이적 요소가 복합된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토정비결은 16세기에 살았던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지함의 호인 토정의 이름을 가탁(假托)한 것으로 본다. 토정비결은 『주역(周易)』의 음양설에 기초하여 구성되었으며 『주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주역』의 64괘(掛)와 달리 48괘만이 사용되고 있는 점, 사주(四柱) 중에서 시(時)를 제외하고 생년월일만으로 상중하(上中下) 3괘를 만드는 점 등이 그 차이이다. 또 『주역』의 괘사(掛辭)와 다르게 길흉화복을 중심으로 괘사가 꾸며져 있는 점이 차이라고 하겠다.
『토정비결』은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월별(月別)의 길흉을 모두 6,480구로 풀어놓고 있다. 이지함과의 연관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점복서가 19세기에 급속히 민간에 유포되어 세시풍속으로까지 정착된 것은 그 당대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군산시 서수면과 임피면 지역에서는 정초에 마을에 한학을 하신 분을 찾아뵙고 토정비결을 보며 쌀이나 보리 등 곡식을 답례로 하였다고 한다. 군산시 옥서면 지역에서도 역시 마을에서 학문이 깊은 어른을 뵙고 토정비결을 보았으며, 때에 따라서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아주는 사람이 마을을 방문하여 토정비결을 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