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2121 |
---|---|
한자 | 土曜同人會 |
이칭/별칭 | 문학,문학 단체,토요 동인,50년대 시문학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태묵 |
[정의]
1950년대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활동했었던 군산 지역 문학인 단체.
[설립 목적]
토요 동인회는 문학을 사랑하고 창작 활동을 즐겨하는 문인들이 창작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순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작품 속에 담아내기 위해 설립하였다.
[변천]
1953년 초 군산에 거주하는 송기원, 정윤봉, 육구영, 고헌, 김영래, 강중희, 김순권, 원형갑 등이 모여 창립한 문학 단체이다. 당시 호남 고무 사장의 부인이자 여류 시인이었던 정윤봉이 자신의 집으로 문인들을 불러들여 문학 창작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회원 대부분이 생활인이어서 토요일에 만나다보니 토요 동인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고은, 이병훈, 정연길, 김규동, 원용봉, 김장호 등이 가세하여 문학 창작의 활기를 더했으나 모임의 주역이었던 정윤봉이 파탄하고, 송기원, 고은, 강중희, 정윤길 등 많은 동인들이 타 지역으로 떠나면서 1957년 자연 소멸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정윤봉의 발상과 제의로 발족된 토요 동인회는 몇 차례의 모임을 거치며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동인 회원 중에는 피난 온 사람과 충청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때 전주에서는 명예 회장격인 신석정을 비롯하여 백양촌, 최승열, 이리[오늘날 익산시]에서는 홍석영, 조두현, 이동주, 광주에서는 박흡 등이 참석해서 동인의 창작 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53년 6월 군산 시내 개복동 비둘기 다방에서 창립 시화전과 작품집을 낸 것을 계기로 1954년 3월에는 군산, 전주, 이리, 광주를 거치는 순회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화전에 출품된 작품은 전주, 광주 등에서 많은 비평과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1955년 10월에는 가람 이병기, 신석정, 서울의 김수영을 초청하여 군산 시내 중앙로 YMCA 회관에서 시문학 강연회를 가졌다. 이틀간 4회 강연을 한 이 모임에서 가람 이병기는 ‘고전 문학’, 신석정은 ‘시를 어떻게 보고 쓰는가’, 김수영은 ‘현대시의 의미’ 등의 내용으로 강연을 하여 토요 동인의 문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토요 동인회원들의 작품 발표는 주로 전주에서 발간한 『태백 신문』과 『전북 일보』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송기원, 고은, 이병훈, 정연길, 김영래, 정윤봉 등의 작품 활동이 두드러졌다.
당시 동인 중에서 정윤봉은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신석정 사사로 시집 『봄 피리』를 출판하였으며, 조향,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해방 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던 월남 문인 김규동은 1955년 첫 시집 『나비와 광장』을 펴내며 문단의 주목과 관심을 받았다. 한편 원형갑과 고은은 1958년 『현대 문학』, 이병훈은 1959년 『자유 문학』, 김신웅과 김동빈은 『시와 시론』과 『현대 문학』에 각각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고, 김영래는 1960년 시집 『나무와 꽃과 사랑의 시』를 출판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었다.
[현황]
당시 토요 동인회의 회원은 회장 송기원, 김순권, 정윤봉, 원형갑, 이병훈, 고은, 권오동, 김영래, 고헌, 김기경, 김신웅, 강중희, 이주완, 원용봉, 정연길, 조설아, 이동주, 김규동, 라병재, 김동빈 등이 있었고, 동인회의 후원자 겸 동반자로는 사진 작가였던 홍건직과 개복동에서 비둘기 다방를 운영했던 이덕 등이 있었다.
2013년 현재 토요 동인회의 주역 대부분은 작고한 상태이다. 이 중에서 고은과 김신웅 등은 문단의 원로 작가로 활약하면서 여전히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고은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노벨 문학상 후보로 다가서고 있으며, 미주에서 활동 중인 김신웅은 2012년 제 14회 해외 문학상 시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의의와 평가]
토착 문화가 박약하고 일제 강점기의 애환이 짙게 남은 군산에 문학의 닻을 내린 토요 동인회는 5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시화전 7회, 비평회 30회, 문학 강연 1회를 열어 중앙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나름대로 창작의 명분과 가치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영향은 이후 1950년대 후반 토문 동인회와 1960년대 시명파 동인회, 70년대 시화회를 거쳐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