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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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里東九陵 |
영어공식명칭 | Guri Donggureung |
이칭/별칭 | 동구릉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인창동 66]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군.
[개설]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이란 뜻이다. 조선 초기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래,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개의 왕릉이 조성되었다. 왕릉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 또는 동칠릉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855년(철종 6)에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된 것을 마지막으로 동구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고양 서오릉이나 고양 서삼릉과 같이 조선의 왕릉이 모여 있는 왕릉군들이 있으나, 구리 동구릉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위치]
구리 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 북서쪽의 구릉산[검암산]을 주봉으로 하여 동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구리 포천 고속 도로, 동쪽으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가 지나며, 구리 동구릉의 동쪽으로는 북부 간선 도로가 지나고 있다.
[변천]
구리 동구릉은 1408년(태종 8)에 태조 건원릉이 조성된 이래 1904년 효정 왕후(孝定王后)가 경릉(景陵)에 안장되기까지 약 500여 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총 9개의 왕릉에 17명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다.
태조 건원릉 다음으로는 1452년에 제5대 국왕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이 조성되었다. 1513년(중종 8)에 문종의 비(妃)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이 옮겨와 현재 현릉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600년(선조 33)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宣祖)의 비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능이 이곳에 조성되었고, 당시 능의 명칭은 유릉(裕陵)이라 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한 후 목릉(穆陵)이 건원릉 서편에 조성되었다가, 1630년(인조 8)에 의인 왕후의 유릉 옆으로 옮겨오면서 유릉이라는 이름은 버리고 함께 목릉이라 하였다. 1632년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능이 또한 이곳에 조성되면서 현재 목릉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674년에 조선의 제18대 왕 현종(顯宗)이 사망하고 숭릉(崇陵)이 만들어졌다. 1684년(숙종 10)에는 1683년 세상을 떠난 현종의 비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능이 조성되어 쌍릉 형태의 숭릉을 이루었다.
제16대 왕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 왕후(莊烈王后)가 1688년에 승하하여 휘릉(徽陵)이 만들어졌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당시 세자빈이던 경종(景宗)의 비 단의 왕후(端懿王后)가 세상을 떠나 혜릉(惠陵)이 만들어졌다.
1776년에 제21대 왕 영조(英祖)의 원릉(元陵)이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이곳은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673년(현종 14) 효종의 영릉은 여주 세종(世宗)의 영릉(英陵) 옆으로 천릉하였으나, 천릉 작업을 위해 땅을 파니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아, 영조의 원릉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1805년(순조 5)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혀, 현재 원릉의 모습을 이루었다.
1855년(철종 6)에는 순조(純祖)의 아들 추존왕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문종의 현릉 옆에 자리잡게 되었다. 본래 익종[효명 세자]은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의릉(懿陵) 옆에 연경묘(延慶墓)가 조성되었다. 이후 익종의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효명 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연경묘 또한 수릉으로 승격되었다. 수릉은 1846년(헌종 13)에 풍수지리 문제가 제기되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겨졌다가, 1855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1890년(고종 27)에 익종의 비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합장하였다. 익종은 이후 문조(文祖)로 다시 추존되었다.
구리 동구릉 중 가장 후대에 조성된 것이 1843년(헌종 9)에 만들어진 경릉이다. 경릉은 본래 선조의 목릉이 있던 곳으로, 물기가 찬다고 하여 목릉을 현재 위치로 옮겼으나 천릉 작업 중 물기가 발견되지 않아 경릉이 조성될 수 있었다. 1843년 헌종의 비 효현 왕후(孝顯王后)가 사망하자 경릉이 만들어졌으며, 1849년 헌종이 승하한 후 효현 왕후의 옆에 능을 만들었다. 1904년 헌종의 계비 효정 왕후가 승하하여 또한 이곳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 경릉의 삼연릉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형태]
구리 동구릉은 전체적으로 북쪽의 건원릉을 기준으로 동쪽에 목릉·현릉·수릉이 있고 서쪽에 휘릉·원릉·경릉·숭릉·혜릉이 배치되어 있다. 각 능은 단릉·쌍릉·삼연릉·동원 이강릉·동원 삼강릉·합장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금석문]
구리 동구릉에는 여러 금석문이 남아 있다. 태조 건원릉에는 유일하게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나머지 왕릉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릉에 신도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으나, 제왕의 공적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로 비석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따라 문종대 이후로는 왕릉에 별도의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비석을 세우지 않은 각 왕릉에 표석을 세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현재 구리 동구릉에 남아 있는 표석 상당수가 영조 연간에 건립된 것들이다. 각 금석문에는 해당 능에 묻힌 주인공과 능호가 새겨져 있다.
[현황]
구리 동구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구리 동구릉은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구리 동구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으로, 조선의 왕릉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 왕실에 있어 신령스럽고 중요한 곳 중 하나였으며, 현재에도 조선 역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