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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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大載 |
영어음역 | Gwon Daejae |
이칭/별칭 | 중거(仲車),소천(蘇川),돈간재(敦艮齋),용문(龍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계화 |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돈간재(敦艮齋)·용문(龍門). 예조판서를 역임한 권협(權悏)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사 권위중(權偉中)이고, 어머니는 신종사(申宗泗)의 딸이다.
[활동사항]
권대재(權大載)는 1646년(인조 24) 사마시, 1653년(효종 4)에 별시문과 을과, 1658년(효종 9) 문과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창평현감을 지냈으며, 1660년(현종 1)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과거의 시관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파직되었고, 1666년(현종 7) 공산판관(公山判官)으로 재임할 때 소송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으로 처신하여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직 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친 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승지·영남순무사·대사간·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다.
오늘의 구로 지역이 포함된 부평 지역에는 1672년 7월 1일 부임해 왔다가, 7월 21일 충주목사로 옮겨 간 바가 있다. 남인이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하는 청남(淸南)과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서 활동했고, 1679년(숙종 5) 청남이 정권에서 물러나면서 종성부사로 쫓겨났다. 그 해 10월 전라감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경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잡자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다. 1683년(숙종 9) 풀려났다가 1687년(숙종 13)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등용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중용변의(中庸辨擬)』, 『사림평요(士林評要)』, 『광산록(光山錄)』 등 다수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