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30 |
---|---|
한자 | 龍淵洞龍淵-祈雨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정 |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에서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용연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는 마을에서 2~4㎞ 떨어진 용추계곡이다. 그 곳에는 3개소의 용소(龍沼)가 있는데 큰 용소, 가운데 용소, 작은 용소라고 불렸다. 기우제는 이 세 용소 중 가운데 용소에서 지냈다. 가운데 용소는 옛날에 깊이가 하도 깊어 명주실꾸리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며, 크기는 자그마한 샘 정도 되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광주 고을에 가뭄이 들면 1차로 천제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다음으로 무등산 신사에서 제를 모시고, 마지막으로 무등산 계곡에 자리한 용연마을의 용추(龍湫)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1781년 전라감사 박우원(朴祐源)[1739~?]이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전라감영으로 돌아가던 중 장성에 이르렀는데, 단비를 얻어 봇도랑까지 모두 물로 가득 차서 메마른 땅이 흠뻑 적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현(黃玹)[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1876년 가뭄 때에 전라감사 정범조(鄭範朝)[1833~1897]가 무등산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자 가물었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연마을 기우제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만 지내다가 가뭄이 그치지 않으면 동에 알려 각 마을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을 뽑아 기우제를 모셨다. 그러다가 광주목사, 전라감사가 와서 지낼 만큼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돌면 날을 잡아 마을 총회를 열게 된다. 마을 총회에서는 기우제의 날짜와 제관을 선정하고 제비(祭費)도 결정한다. 날이 잡히면 제관으로 뽑힌 헌관 세 사람과 축관 및 심부름꾼들은 여러 가지 금기 사항을 지켜야 한다.
기우제의 구체적인 준비는 제사 당일에 한다. 심부름꾼으로 뽑힌 사람 중 일부는 제물을 사러 장에 간다. 장에 갈 때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값도 깎지 않는다. 장에서 사는 물건은 삼실과, 포, 시루, 양초, 백지, 오곡 그리고 돼지 한 마리 등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을에서 용추계곡에 이르는 산길을 말끔히 정리한다. 또 이들은 밤에 불을 피울 나무도 미리 베어 제장(祭場) 옆에 준비해 둔다. 미리 길을 내면서 용추에 오른 사람들은 그 사이 제청(祭廳)을 만든다. 제청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제상을 놓고 절을 할 수 있는 넓이로 하는데, 나무를 베어서 곱게 다듬어 네모나게 짓고 사방에 백지를 바르고 천정은 흰 광목으로 쳐서 하늘을 가린다. 제청 안에는 납작한 돌로 제상을 만들고, 주위에는 널찍이 금줄을 치고 종일 그 곳을 지킨다. 저녁 9시경 제물의 준비가 끝나면 제물을 점검하여 산에 오르게 된다. 그때쯤 되면 제물은 제장으로 옮겨진다. 제물을 준비하였던 사람들이 제물을 나누어 지게에 지고 나면 옆에서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횃불로 밤길을 밝히고 그 뒤를 세 헌관과 축관이 따른다. 모두가 제장에서 만나게 되면 미리 준비해 둔 나뭇단에 불을 지핀다.
제의 절차는 일반 제사와 같이 유교식의 순서에 따라 지냈다. 그러나 제물 중 돼지머리는 익히지 않고 생것으로 올렸다. '분향재배 → 강신재배 →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사신 → 소지 → 헌식'의 순서로 제사가 진행된다. 헌식은 제사상에 놓았던 돼지머리를 잘라서 용소에 던지 넣는 의식이다. 제사가 모두 끝나게 되면 제청을 뜯어 함께 불을 피우는데, 이때 피우는 불이 크면 클수록 큰 비가 온다고 믿었다.
1987년 용연마을 조사 당시 71세의 제보자는 마을에서 올린 기우제에 서너 차례 참여하였다고 구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용연마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기우제를 모셨던 용소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