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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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靑年會 |
영어공식명칭 | Gwangju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영님 |
[정의]
1920년 6월 광주광역시에 설립된 청년 단체.
[설립 목적]
1920년대는 3.1운동의 결과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정치’ 아래 집회·결사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청년들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초에 활동했던 사회단체의 절반 정도가 청년단체였다는 사실은 청년들의 사회참여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이처럼 당시 전국적으로 청년운동단체가 급증하였는데 광주 지역에서도 최초로 광주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광주청년회는 지덕체를 함양하고 친선 도모 및 풍속을 개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변천]
1920년 6월 12일 광주청년회가 광주청년회관에서 설립되었고, 1925년 말 흥학관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 조직된 광주 지역의 청년회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광주청년회 역시 광주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가운데 하나인 ‘신문잡지종람소’ 그룹이 중심이 되어 창립에 이르렀다. 광주청년회를 주도했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회장 최종섭, 부회장 정인준, 서기 전순협, 회계 최선진 등이 있다. 이들은 광주상업조합을 발기한 인물로 주로 지역 실업가 및 금융업 종사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간부 이기호의 사임파동이나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강석봉의 급부상은 광주청년회의 정치적 성향과 변화를 보여준다. 이같은 변화에 의해 1920년대 중반이 되면 광주청년회의 초기 간부는 18명 중에 6명만 남고 지도부가 전면적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광주청년회가 중점을 둔 것은 강연이나 야학 등을 통한 교육과 계몽활동이다. 광주청년회는 여자 야학을 시작으로 노동연맹과 연대하여 노동야학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청년학원을 운영했는데 한글, 한문을 습득한 청소년을 위한 보통학교 1-4년학년 수준의 제 1부와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5-6학년 수준의 제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광주청년회는 여성과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실력양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광주청년회의 활동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의의와 평가]
광주청년회는 광주 최초의 청년단체로서 1920년대 민족운동이 전개되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