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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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曺氏三綱旌閭 |
영어공식명칭 | Samgang Jeongnyeo Monument of the Changyeong Jo Cla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용철 |
건립 시기/일시 | 1923년 - 창녕조씨 삼강정려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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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1년 - 창녕조씨 삼강정려 중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월 19일 - 창녕조씨 삼강정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 지정 |
현 소재지 | 창녕조씨 삼강정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 |
성격 | 정려 |
양식 | 골기와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산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창녕조씨 정려.
[개설]
창녕조씨 삼강정려는 창녕조씨 일가 중 4대의 충(忠), 효(孝), 열(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897년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1923년 건립하였으며, 2011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趙彦壽)의 충(忠), 조언수의 손자 조무악(曺舞岳)과 증손자 조후건(曺厚建)의 효(孝), 며느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열(㤠)을 기리는 내용을 정려(旌閭) 안의 정면과 왼쪽에 현판을 만들어 기록하고 있다.
충신 조언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고, 조언수의 손자 조무악은 부친 조성복이 젊어서 세상을 뜨자 과부가 된 모친 문화류씨(文化柳氏)를 정성껏 섬기고 가난한 살림 중에도 어머니께 단 한번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효자인 조언수는 어머니가 병상에 눕자 대변을 혀로 맛보아 병세를 알아보고 엄동설한에 물고기를 구하여 드렸으며, 선약(仙藥)을 구하여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효험이 없이 별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열부인 문화유씨는 남편이 병상에 눕자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 결국 3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뒤를 따르려고 하였지만, 어린 두 아들을 위하여 수절하였다. 증손자 조후건은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고 부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하였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창녕조씨 삼강정려는 아름다운 단청으로 장식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익공(初翼工) 장식이며, 굵고 둥근 기둥과 얕지만 안정된 둥근 초석은 안정감이 있으며, 3량집 형태의 골기와 맞배지붕 건물이다.
입구 왼쪽에는 검은색 돌로 제작한 창녕조씨 삼강정려비가 있으며, 비각은 무궁화 문양이 장식된 사각형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현황]
창녕조씨 삼강정려는 한 가족을 모은 삼강정려로 흔하지 않아 역사적 의미가 있고,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정려 건축의 특징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1923년 건립되었다가 다시 2011년에 중건된 정려비각 오른쪽에는 직사각형의 오석(烏石)으로 만든 삼강정려각 중수중건기(三剛旌閭閣重修重建記)가 서 있으며, 외부는 낮은 흙담으로 되어 있다. 낮은 문 입구에는 창녕조씨 삼강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여내(閭內)에는 창령조씨 삼강정서(昌寧曺氏三剛旌序), 동몽교관창령조공교행기(童蒙敎官昌寧曺公敎行記)가 기록되어 있다.
창녕조씨 삼강정려는 2012년 1월 19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녕조씨 일가 중 4대의 충, 효, 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삼강정려는 흔하지 않아 역사적 의미가 크고, 정려 건축물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정려비의 내용을 읽고 배움으로써 지금의 세대와 다음 세대들이 충, 효, 열의 뜻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