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09
영어공식명칭 Florence Elizabeth Root
이칭/별칭 유화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양라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후로렌스 룻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월 11일 - 후로렌스 룻 수피아여학교 음악 교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4월 1일 - 후로렌스 룻 수피아여학교 제5대 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0월 14일 - 후로렌스 룻 수피아여학교 제8대 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12월 5일 - 후로렌스 룻 수피아여학교 제10대 교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후로렌스 룻 사망
출생지 쿠퍼스타운 - 미국 뉴욕주
학교|수학지 스미스대학 - 미국 매사추세츠주
활동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백서로 13 [양림동 242]지도보기
성격 선교사
성별
대표 경력 수피아여학교 제5대 교장|수피아여학교 제8대 교장|수피아여학교 제10대 교장

[정의]

일제강점기 수피아여학교장을 역임하며 호남 지역 선교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던 미국 출신의 선교사.

[개설]

후로렌스 룻(Florence Elizabeth Root)[유화례(柳華禮)]은 1893년 미국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태어났으며, 매사추세츠추 스미스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주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1927년 교육 선교사로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하여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4월 제5대 수피아여학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하였다. 1942년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탄압으로 강제 출국을 당했지만, 1947년 다시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펼쳤다. 6.25전쟁이 발발했을때 미국 대사관에서 귀국을 종용했으나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인들을 남겨놓고 나만 떠날수는 없다."며 교회를 지켰다. 1957년 수피아여학교장직을 은퇴하였고, 1963년 공식적인 선교사직에서도 은퇴하였다.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가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에 있는 장로교 은퇴자 수양관에서 지내다가 1995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927년 한국에 파송(派送)되어 수피아여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수피아여학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학교를 폐교하였으며,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탄압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가 1942년 강제 출국을 당하였다. 1947년 다시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왔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후로렌스 룻은 위험을 무릅쓰고 신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을 숨겨주었다. 인민군들이 포악한 모습을 드러내자 고아 400여 명들과 함께 화순 화학산(華鶴山)에 있는 동굴로 피신해 3개월을 보냈다. 광주가 수복되자 인민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의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며 이들을 보호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6.25전쟁 이후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와 교육 및 선교 활동을 계속 펼쳤다. 공식적인 선교사직에서도 은퇴하고나서도 전라남도 섬 지역을 돌며 선교 활동을 전개하는 등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헌신적인 선교 활동을 하였다.

[묘소]

후로렌스 룻의 묘소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다.

[상훈과 추모]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1974년 동문들의 모금으로 준공한 유화례 교장 기념도서관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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