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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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懷園-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최인학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영회원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영회원의 슬픈 이야기」는 봉림대군, 소현세자, 그리고 소현세자 비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 등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개작된 인물담이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사적 제357호인 영회원(永懷園)은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1644년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환국 후 두 달, 병중에 있은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하게 되었다.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소현세자의 원손은 왕위 계승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강빈과 반목질시하던 조소용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강빈은 인조 거실 근처에 가서 통곡하고, 그때부터 왕에게 조석문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후원 별당에 유치되었다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어 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귀양을 가게 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장살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그 뒤 1718년(숙종 44)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복원묘(復元墓)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903년(고종 7)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채록/수집상황]
1993년 광명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광명시지』의 576~579쪽과 1993년 광명문화원에서 간행한 『광명문화』 창간호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내용]
조선 인조 임금 때, 청나라가 두 차례나 쳐들어왔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 임금은 난처한 처지에 놓여 할 수 없이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신하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간 인질들은 8년 동안 고생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그때 청나라 왕은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소원을 말하라”는 말을 하자, 소현세자는 청나라 왕이 직접 아끼는 용연벼루를 받게 되었고, 봉림대군은 같이 끌려온 신하들을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
고국에 돌아오자 인조대왕은 기뻐하여 왕자들에게 물었다. “청나라 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봉림대군이 말하기를 “예, 그는 매우 교활한 사람입니다. 청나라에 반대하지 못하게 잔치를 베풀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끌려온 백성들을 데리고 왔습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왕은 매우 기뻐하며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소현세자는 “저는 청나라 임금이 가장 아끼던 용연벼루를 받아 왔습니다.”고 하자 임금은 “예끼, 이 못난 놈아!”하고 벼루를 내던지자 소현세자의 이마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세자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강빈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이 무렵 궁궐에는 강빈을 미워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인조의 귀여움을 받은 조귀인이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민회빈이 저를 죽이려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저주한다 하더이다.”, “세자가 죽은 일로 임금님을 원망하더이다.”, “강빈이 임금을 미워해서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 하더이다.” 이러한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결국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강빈은 억울함과 슬픔을 안은 채 젊은 나이로 슬픈 삶을 마쳤다. 이후 숙종 임금은 강빈의 억울함을 알고 다시 세자빈으로 부르게 하고, 고종 임금 때에는 묘소를 영회원이라 높여 부르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영회원의 슬픈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인질이 된 소현세자의 용연벼루와 봉림대군의 사람’, ‘권력의 소유욕과 암투의 갈등’ 등이다.
옛날에는 전쟁에서 지면 왕족 중에서 승전국의 인질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또한 귀국할 때 소현세자는 선물로 왕의 벼루를 선택하여 받았고, 봉림대군은 같이 인질로 끌려간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그 때문에 소현세자는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이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력의 소유욕과 암투의 갈등으로 소현세자는 병사했고 반대파의 음모와 항변으로 결국 강빈도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 임금 때 사실이 판명되어 다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