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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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謀陷-具壽福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인학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종과 구수복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은 광명시의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중 구수복(具壽福)[1491~1535]이 삭탈관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장인에게 쫓겨난 후에 학풍을 다시 일으켰다는 인물담이다. 조선 전기 문신인 구수복의 자는 백응(伯凝), 호는 병암(屛庵)·수재(睡齋)이다.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정랑으로 재직하던 1519년 기묘사화 때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심정(沈貞) 등으로부터 북문을 열라고 협박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화가 일어난 뒤 삭직(削職)되었다. 1533년 이준경(李浚慶) 및 아우 구수담(具壽聃) 등의 힘으로 구례현감으로 복직되었으나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채록/수집상황]
1996년 광명문화원에서 발행한 『광명의 뿌리』의 41~42쪽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정회[전 경기도의원]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내용]
구수복은 방면되자 즉시 서울을 떠나 경상도 상주 평온으로 낙향했다. 은거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5년을 지냈는데, 장인인 단산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가 사위를 딱하게 여겨 보은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들이 싫어해서 중상하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장인 이수가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노하여 사위를 쫓아냈다.
이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 한 필과 연약한 종 한 사람을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는데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수많은 종과 매와 사냥개를 몰고 지나가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이에 그가 말 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그대는 누구시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함에, 구수복이 연유를 대개 말하니, 그가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 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소하면서 꿩을 구워 안주로 술을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 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같이 갔다.
그리고 그가 가옥과 전토 수십 경을 주어, 구수복이 부인과 셋 딸이 함께 편히 살도록 하고 날마다 만나서 즐겁게 지냈다. 그 호걸남자는 찰방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보은에 내려온 김태암(金泰岩)이었다. 그 후 구수복은 학풍을 일으켜 후진을 많이 배출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티프 분석]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의 주요 모티프는 ‘종의 모함으로 쫓겨나서 다시 학풍을 일으킨 구수복’이다. 주인이 종을 학대하여 내쫓는 경우는 흔히 있는 모티프이지만 반대로 종들이 모함하여 주인을 내쫓는 모티프는 드물다, 구수복은 오히려 서민적이요, 종들이 옳지 못한 모함을 해도 일일이 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 이런 성품을 지닌 구수복은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는 김태암의 도움으로 호구지책이 해결되어 학문에 계속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는 결국 장인이 의도한 대로 학풍을 일으켜 후진을 많이 배출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