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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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象牙塔-一等敎育-都市慶山 |
영어공식명칭 | Home of the ivory tower, first-class education, Gyeongsan, the city of youth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채광수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교육 도시 성립 배경과 역사.
[개설]
경상북도 경산시는 ‘교육 도시’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의 여러 시·군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꾸준히 초·중·고등학교가 설립되어 왔고, 대구광역시와 인접하고 있으며 교통의 발달로 접근성이 좋아져 많은 대학교가 경산시로 옮겨오거나 새롭게 설립되었다. 경산시가 교육 도시로 자리매김 한 것은 전통 시대 이후 지속된 경산시의 성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시대 경산의 교육]
국립 교육의 존재 양상은 삼국 시대 고구려의 ‘태학(太學)’, 백제의 ‘박사(博士)’, 신라의 ‘국학(國學)’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교육 기관 외에도 교육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화랑도를 통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경산 지역은 바로 화랑도가 수련했던 곳 중 하나였다. 또한, 신라 시대 교육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인 원효(元曉)[617~686]가 경산 지역 출신이며, 아들 설총(薛聰)[655~?] 역시 신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고려 시대 지방 교육의 중심은 향교였다. 향교는 인종(仁宗)[재위 1122~1146] 대 여러 주현에 처음 건립된 이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산향교는 1390년(공양왕 2)에 처음 건립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 경산 지역에 향교가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경산 지역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1206~1289]과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고향인 이유로 읍격으로 상승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지방 교육은 관학인 향교와 사학인 서원·서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의 교육 역시 크게 향교와 서원에서 이루어졌다. 하양향교는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명신 허조(許稠)[1369~1439]가 하양 지역에서 배출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여말선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인향교의 경우 경주부윤 이정(李楨)의 건의로 1562년(명종 17)에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 3개 향교에는 교관으로 훈도(訓導)가 파견되었으며, 교생의 정원은 30명, 둔전은 12결이었다. 향교에서 배우는 교과는 시대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전 시기를 일관하여 『소학』, 사서삼경, 『성리대전』, 『가례』, 『의례』, 삼강행실 및 이륜행실, 『효경』, 『근사록』, 『심경』, 『통감』, 『송원절요(宋元節要)』, 강목(綱目) 및 사략(史略), 『문선(文選)』, 『고문진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잡학과 기술관계 서적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경산 지역의 경우 대현(大賢)을 제향한 서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향교가 지역 사회의 교육과 더불어 향론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였다.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세기 초반 경산 양사재(養士齋)와 하양 육영재(育英齋)가 지방관에 의해 건립되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된 이후에는 근대학교가 각지에 설립되면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완전히 단절되고 재산과 부지가 공립학교로 넘어가게 된다. 경산향교의 부지가 경산공립보통학교, 자인향교의 재원이 사립양성학교에 제공된 것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한편,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의 핵심 기능은 교육이다. 서원의 교육 목적은 제향된 선현(先賢)의 삶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제향을 통해 선현을 모시고, 선현이 학습했던 경전을 읽고 선현이 활동했던 공간에서 유식을 경험하며 선현의 모습을 닮고자 하였다. 각 서원은 주희가 만든 서원 규정인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바탕으로 지역 실정에 맞게 조정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서원이 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출판 및 도서관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교남지』에서는 전통 시대 경산 지역에 설립되었던 여러 서원과 사우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경산현에는 이황(李滉)과 정경세(鄭經世)를 제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이 1573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서사선(徐思選)을 제향한 옥천서원(玉川書院), 여대익(呂大翊)을 제향한 송호서원(松湖書院)이 있었다. 자인현에는 1659년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한 관란서원(觀瀾書院)이 건립되었고, 이를 필두로 1700년 최문병(崔文炳)을 제향한 용계서원(龍溪書院)이 건립되었으며, 이광후(李光後)·이창후(李昌後)·김응명(金應鳴)을 제향한 상덕사(尙德祠), 안우(安祐)·안지(安止)를 제향한 조곡사(早谷祠)가 존재하였다. 하양현에는 1684년 허조(許稠)를 제향한 금호서원(琴湖書院)이 건립되었는데, 훗날 경산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사액을 받게 된다. 또한, 김시성(金是聲)을 제향한 남호서원(南湖書院), 이간(李榦)을 제향한 임호사(臨湖祠)가 건립되어 향촌 교화와 교육에 앞장섰다. 이 외에도 조선 후기 경산 지역에는 향유(鄕儒)와 지방관의 주도로 정사·서재·누정 등 지역 문풍을 진작하는 상당수의 교육 공간들이 건립되었다.
[경산의 성장과 근대 교육의 시작]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이른바 신교육운동이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민족 교육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06년 3월 「흥학조칙(興學詔勅)」이 반포되자,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申泰休)가 「흥학훈령(興學訓令)」을 통해 관내 각 군에 사립 학교 설립을 촉진하였다.
경산 지역에 처음 설립된 신교육 기관은 1906년 10월 자인 지역에서 개교한 사립포명학교(私立布明學校)이다. 김영희(金永喜)가 설립한 사립포명학교는 향교 재산을 보조 받아 설립 재원으로 활용하였으며, 교사(校舍)는 관청 건물을 사용하였다. 처음 초빙된 교원 시미즈 후사키치[淸水房吉]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던 일본 군인이었다. 일어(日語)·산술(算術)·체조를 교수하였으며, 학생은 30명 내외였다. 그러나 1907년 5월 시미즈 후사키치가 사직하면서, 사립포명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경산 지역에는 순차적으로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립포명학교를 포함하여 모두 16개의 학교가 확인된다. 이를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1906년 하양의 보정학교(普晶學校)[송서동교회], 1907년 용성의 당리학교(堂里學校)[송림학교], 자인의 양성학교(養成學校)[김영희], 경산의 풍진사숙(豊進私塾)[이준섭(李準燮) 외 6인]와 삼산학교(三山學校), 1908년 자인의 배의학교(培義學校)[이영선(李永善)], 1909년 자인의 덕숭학교(德崇學校), 하양의 진명학교(進明學校), 경산의 명륜학교(明倫學校)와 계동학교(啓東學校)[신기교회], 1910년 자인의 숭덕학교(崇德學校)[당곡교회], 안심의 계남학교(啓南學校)[동호교회], 남산의 진신학교(進新學校)[전지교회], 진량의 도명학교(道明學校)[봉회교회[지금의 진량제일교회]], 1913년 경산의 경명학원(慶明學院)[정문국(鄭文國)]이 있다.
이 가운데 덕숭학교는 1909년 9월에 자인 북사동[현 자인면 북사리]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창설되었다가 재정 곤란으로 1927년 폐교되었다. 1907년 4월 24일 경산 지역에 설립된 삼산학교는 1909년 5월 1일 명륜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또한, 1907년 4월 경산 중방동 지역에 이준섭 등의 발기로 풍진사숙(豊進私塾)이 설립되었는데, 1909년 4월 학부의 인가를 얻어 계동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외에도 1907년 자인군수 진영염이 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9월 하양 지역에 진명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교회가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의 대부분은 미국 북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이 설립한 것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도명·진덕·계동·계남학교는 계성학교의 설립자인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사립 학교에서 실시되는 민족 교육을 통제하고자, 1915년 3월 ‘사립학교규칙’을 개정 및 공포함으로써, 사립 학교의 설치·변경·교원 교체 시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사립 학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경산 지역에서도 폐교가 이어져, 1919년까지 존속하였던 사립 학교는 하양의 보정학교 1개교만이 확인될 뿐이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교육 분야에서도 일제의 정책에 복종할 ‘충량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우민화 정책이 이루어졌다. 1911년 9월 칙령 29호 ‘조선교육령’을 제정 및 발표하여 4년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2~3년제 실업학교, 3~4년 전문학교를 설치하고 일본어와 기술 위주로 교육하며, 이를 식민지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경산 지역에서도 1918년 기준 공립소학교 4개교와 공립보통학교 3개교가 설치되었다. 이 중 자인공립·육향공립·경산·하양심상소학교 등 공립 소학교는 모두 일본인 학생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으며, 경산·하양·자인·용성공립보통학교는 조선인 학생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 해소를 명분으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기존의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상이했던 입학 제도를 개선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경산 지역의 경우 개선된 제도가 실질적으로 교육 현장에 반영되지 않았다. 다만, 학교와 학생 수는 증가하여 1922년 9개교에 학생 수 1,150명[조선인 988명, 일본인 162명], 1931년 12개교에 학생 수 2,160명[조선인 1,968명, 일본인 192명], 1934년 17개교에 학생 수 2,851명[조선인 2,668명, 일본인 183명], 1937년 19개교에 학생 수 3,984명[조선인 3,806명, 일본인 178명]이 확인된다.
1920년대 이후 경산 지역에 설립된 학교의 대부분은 보통학교로, 1922년 진량보통학교, 1923년 용성보통학교, 1928년 압량보통학교·남산보통학교, 1929년 안심보통학교, 1931년 와촌보통학교·고산보통학교·미촌보통학교, 1932년 남천보통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또한, 용성보통학교 부설 중화학교가 1922년에, 하양보통학교 부설 숭덕학교와 진량보통학교 부설 지신학교가 1923년에 1개 학급, 2개 학년으로 설립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교육 분야에서도 최악의 교육령을 제정하여 현장에 적용시켰다. 규정 개정, 조선어 교육 금지, 교과서 인가 강화 등의 조치에 이어 1943년 10월에는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 1944년 8월에는 ‘학원동원령’을 내려 제대로 된 교육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8·15광복 이전까지 경산 지역에 존재했던 학교는 국민학교 18개교, 간이학교 6개교로, 중등교육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교육 도시로 자리매김하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은 1945년 9월 11일 초등·중등·대학·의학·전문교육을 주관하는 학무국을 개국하였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학교들의 재개교가 이루어졌다. 경산 지역에서는 1946년 와촌국민학교 계당분교, 1947년 하양서부국민학교가 개교하였고, 중등학교인 사립경산중학교와 자인농업초등학교가 1946년과 1948년에 각각 문을 열었다.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을 공포하였다.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천명하였으며, 교육자치제 실시, 교육세 부과, 학도호국단 운영 등 교육 분야가 정비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학교와 학생, 교원 수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경산 지역에서도 하양초등학교와 하양동부초등학교의 통합, 삼성초등학교 신설, 계당분교의 승격[계당초등학교]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립 경산중학교가 공립으로, 자인농업초등학교가 자인중학교로 각각 전환되었고, 자인중학교 용성분교, 사립 진량중학교와 하양중학교가 설립되는 가운데, 통영 지역에 있던 영남삼육중학이 경산 지역으로 이전해 왔다. 진량농업고등학교, 영남삼육고등학교, 경산여자중학교도 같은 시기에 설립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부정권은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사립학교법’ 등을 제정하여 교육에 관한 국가 통제를 강화시키는 기조를 유지하였다. 1960년대 경산 지역에서는 진량국민학교 진성분교, 남천국민학교 금곡분교가 개교하였는데, 금곡분교는 1966년 본교로 승격하였다. 중등교육에서는 용성분교가 승격하였고, 3학급 규모의 경산상업고등학교가 설립되는 등 학교 수에서 지속적으로 증가 양상을 보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68년 6월 영남대학교가 경산의 압량벌로 이전해 온 것이다. 영남대학교의 이전은 경산 지역이 상아탑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는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이념 하에 국사 교육이 강조되었고, 민족사적 정통성을 고취하고자 하였으며, 한국 민주주의 토착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시기 경산 교육의 특징은 국민학교 학생 수 감소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는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인접해 있는 대구 지역으로 전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974년 엘리트 체육인 양성을 위한 특수 목적 고등학교인 경북체육중·고등학교가 경산 지역으로 이전해 왔다. 한편, 1979년 3월 1일에는 영남대학교에 이어 대구대학교[당시 교명 한사대학]가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로 캠퍼스를 이전하였다.
1980년대 교육은 ‘7·30 교육개혁 조치’ 즉, 교육정상화와 과외 해소 방안 및 전인·정신·과학기술·평생교육으로 대표되는 4대 정책이 핵심이었다. 이 시기 경산시는 학원도시로 비약적인 성장을 맞이하였다. 이농현상이 노정되어 여전히 학생 수는 감소하였지만, 대학교육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80년 대구한의대학교[당시 교명 대구한의과학대학]가 설립되었고, 대구 지역에 소재하였던 여러 대학교들이 경산시로 캠퍼스를 이전해 왔다. 1981년 경북실업전문대학, 1984년 대신대학교[당시 교명 대구신학교], 1989년 영남신학대학교[당시 교명 총회야간신학교], 1987년 대구가톨릭대학교[당시 교명 효성여자대학교] 등이 연달아 이전하면서 경산시는 대학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0년대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 등 교육에 대한 다방면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특히,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경되었고, 비수도권 지역에서 보다 쉽게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대학설립준칙주의’가 공포되었다. 이 시기 경산 지역에는 택지 지구와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 유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영향으로 학교 신설이 이루어졌다. 이에 1992년 경산동부초등학교, 1993년 장산초등학교, 1997년 금락초등학교·서부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또한, 1992년 호산대학교[당시 교명 경동전문대학교], 1993년 대경대학교[당시 교명 대경전문대학], 1995년 영남외국어대학교[당시 교명 경북여자외국어전문대학]가 설립되었으며, 1994년 대구 지역에 소재하였던 경일대학교[당시 교명 경북산업대학교]가 경산시 하양읍으로 이전해 오면서 대학 도시로서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
200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경산시는 연 5,000여 명의 인구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인구의 증가는 산업단지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와 함께 택지 개발 지구와 신축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학교들이 들어섰다. 2001년 정평초등학교, 2003년 성암초등학교·사동초등학교, 2005년 옥곡초등학교, 2008년 봉황초등학교, 2011년 평산초등학교, 2015년 삼성현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중학교는 2003년 사동중학교, 2006년 삼성현중학교, 2009년 신상중학교, 2019년 압량중학교, 고등학교는 2007년 경산과학고등학교, 2014년 대경문화예술고등학교, 2015년 사동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대학교는 2001년 대구사이버대학교와 영남사이버대학교, 2003년 아시아대학교[2008년 폐교], 2010년 한국복지사이버대학이 개교하였으며, 특수학교인 경산자인학교가 2013년 개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초등학교 7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3개교, 대학교 4개교, 특수학교 1개교 등의 학교 신설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경상북도의 여타 시·군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중 경산과학고등학교는 경상북도의 유이한 과학고등학교로서 우수한 과학 영재들의 요람이 되고 있다. 경산자인학교는 장애 학생들의 자립을 위해 운영되는 소중한 특수학교이다. 대경문화예술고등학교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여 글로벌한 전문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는 대안학교이다.
2020년 현재 경산시에 소재한 학교는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12개교, 특수학교 1개교, 대학교 13개교로 총 73개교이다. 이는 ‘상아탑의 고장, 일등교육, 젊음의 도시 경산’이라는 명성에 부합하는 규모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