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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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山 兵營遺蹟 |
영어공식명칭 | Gyeongsan Military Training Ground |
이칭/별칭 | 압량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 179|압량읍 내리 389|진량읍 선화리 948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박장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4월 28일 - 경산 병영유적 사적 제218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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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7월 28일 - 압량유적에서 경산 병영유적으로 개칭 |
현 소재지 | 경산 병영유적 -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 179|압량읍 내리 389|진량읍 선화리 948 |
성격 | 병영 유적 |
관련 인물 | 김유신 |
면적 | 41,174㎡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제218호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 일원에 있는 삼국 시대 군사 훈련장.
[건립 경위]
경산 병영유적은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로 있을 때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유적이다. 김유신이 압량주군주로 임명될 무렵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특히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백제군이 차지한 것은 신라 입장에서 커다란 타격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외교로 극복하기 위해 김춘추(金春秋)[603~661]가 고구려로 가 연개소문(淵蓋蘇文)[?~665]을 만났으나 성과가 없었다.
한반도에서 고립되어 가던 신라는 수도 경주를 지키기 위해 김유신을 압량주군주로 삼았다. 압량주는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로, 경주를 방어하는 마지노선이었다. 김유신은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며 백제군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위치]
경산 병영유적은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 일대에 있다. 오목천 주변의 구릉 위에 총 3개의 연병장이 자리하고 있다. 연병장 간의 거리는 약 1~3㎞이다. 제1연병장은 압량읍 압량리에 있는데,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자리한다. 제2연병장은 압량읍 내리에 있다. 제3연병장은 진량읍 선화리에 있으며, 제1연병장과 마찬가지로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경산 병영유적은 총 3개의 연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병장은 얕은 구릉 위에 7m 높이로 흙을 쌓고, 윗면을 평평하게 하여 원형 광장을 조성하였다. 둘레는 약 300m이다.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 10m의 토루가 있다.
제2연병장은 구릉 자연면에 약간의 토축을 하고,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동남쪽에 높이 15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현재는 크게 훼손되었다.
제3연병장은 얕은 구릉 선단부에 자리한다. 구릉 말단부에 10m 높이의 토축 원형 광장[지름 80m]을 구축하고, 원형 광장 북쪽에 치우쳐 높이 2m, 윗면 지름 13m의 토루를 쌓았다.
[의의와 평가]
경산 병영유적은 경산 지역이 신라 시대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을 실증해 주는 유적으로 가치가 있다. 특히 김유신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삼국 통일의 초석을 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