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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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山 坪山洞-鑛山 |
이칭/별칭 | 춘길광산,보국코발트광산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산40-1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경희 |
준공 시기/일시 | 1937년 6월 -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 금은 광산으로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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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 금은 광산에서 코발트 광산으로 전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초~9월 초 -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 발생 |
개관|개장 시기/일시 | 2013년 - 코발트광산역사평화공원 조성 |
최초 설립지 |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 -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산40-12 |
현 소재지 |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 -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산40-12 |
성격 | 산업 시설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광산.
[개설]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1937년 채광을 시작한 한반도 내의 대표적 일제 수탈지로, 1945년 해방 직전에 폐광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 직후 군경에 의해 한국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저질러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학살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건립 경위]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1937년 6월 26일 일본인 니노미야 다이조[二宮泰三]가 금은 광산[광업허가 제14403호]으로 등록하여 영업하다가, 1942년 코발트 광맥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1943년에 코발트 채광·선광·제련 시설을 갖추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코발트 광산이다.
[변천]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거미줄처럼 뚫린 갱도를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달아나면서 흉물로 전락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폐허가 된 코발트 광산에 경산·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대구교도소 수감자들을 끌고 가서 죽인 후, 수직굴과 수평굴 등에 매장하였다.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3,500명에 이르고 있다. 이후 광업권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중석광업[현재의 대구텍]이 보유하고 있다가 매각하였다.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함에 따라 2007년 6월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2013년 코발트광산역사평화공원이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성]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의 갱도는 수직 1굴과 2굴[경산시 평산동 산40-12], 수평 1굴[경산시 평산동 591-2], 수평 2굴[경산시 평산동 652-9]이 남아 있다.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에서 채굴된 코발트 원석은 경산시 상방동의 선광장으로 보내져 선광·제련되었다.
[현황]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경산시와 경산코발트광산민간인희생자유족회에 의해 2013년부터 ‘평산동역사체험관광지’로 조성되고 있다. 2020년 9월 현재 코발트광산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폐갱도 등이 현장 보존되어 있다. 이외에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관광 데크, 안내판 등도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