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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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鶴洞錄-鄭栻- |
영어의미역 | Record of Cheonghak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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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46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43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범왕리 |
성격 | 한문학|유람록 |
작가 | 정식(鄭栻)[1683~1746] |
[정의]
1743년 명암 정식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청학동록(靑鶴洞錄)」은 정식(鄭栻)[1683~1746]의 『명암집(明庵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정식은 1743년(영조 19) 4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 9일 동안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정식의 청학동 유람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이외에도 「두류록(頭流錄)」 1편이 전한다. 「두류록」은 1724년(영조 즉위년) 8월 2일부터 8월 9일까지 진행된 1차 유람과, 같은 해 8월 17일부터 8월 27일까지 진행된 2차 유람을 통합하여 기록한 유람록이다.
1차 유람은 산청 덕산을 출발하여 천왕봉에 오르는 일정이었고, 돌아온 후 쌍계사(雙磎寺) 남쪽을 유람하고자 하여 다시 2차 여정에 올랐다. 2차 유람은 하동 오대사(五臺寺)→악양→쌍계사→불일암(佛日庵)→칠불암(七佛庵)→신흥암→삽암(鈒巖)을 둘러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두류록」에서는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雙磎石門) 석각에서부터 쌍계사와 불일암에 거주하는 승려와의 만남, 승려들의 생활 모습, 칠불암의 모습과 관련한 역사 기록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정식의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9살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합천의 시험장에 갔다가, 우연히 송나라 호전(胡銓)의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유건(儒巾)을 찢어 버리고 돌아와 명암거사(明庵居士)라 자호하였다. 일생 동안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유람을 좋아하여 경관이 빼어난 우리나라 명승은 정식의 족적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1,915m] 덕산으로 들어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손수 주희(朱熹)[1130~1200]의 초상을 그려 벽에 걸었다. 또 용담(龍潭) 가에 와룡암(臥龍庵)을 짓고 제갈량((諸葛亮)[181~234]의 초상을 걸었다. 정식은 주희와 제갈량을 자신이 배울 만한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는 스승처럼 여기고, 그 학문과 정신을 배우려고 하였다. 주희와 제갈량을 존숭한 데에는 명나라를 부흥시켜 명나라의 수준 높은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정식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1760년(영조 36) 관찰사가 정식의 행적을 올리니, 8년이 지난 1767년(영조 43)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벼슬을 추증하는 교지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이라 썼는데, 이는 실로 특별한 명령에 의한 예외적인 경우였다. 조정에서 정식의 의리를 장려하고 지절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저술로 『명암집』이 있다.
[구성]
봄날 나선 하동군의 청학동 유람에는 집안의 조카인 정상기(鄭相琦)와 정상인(鄭相寅), 향도자 김광서(金光瑞), 피리 부는 악공 김윤해(金潤海)와 현덕승(玄德升) 등이 동행하였다. 유람 일정은 정식의 거주지인 산청 덕산 무이정사를 출발하여 악양→화개→쌍계사→불일암→국사암→칠불암→신흥암을 둘러보고 귀가하는 일정이었다. 글의 구성은 유람을 떠나는 경위부터 유람 일자별로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용]
「청학동록」은 1724년에 이뤄진 하동군의 청학동 유람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 쓴 유람록이다. 따라서 유람 지역은 2차 청학동 유람을 기록한 「두류록」과 유사하며, 쌍계사와 불일암 등의 사찰에 대한 역사나 주변 경관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지 않다. 차이라면 「청학동록」에는 하동군의 청학동 아래에 있는 내원암(內院庵) 일대와 향로봉에 올라 조망한 경관을 세밀히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정식은 불일암 앞 향로봉 정상을 힘들게 올라가서는 가슴이 시원하여 하늘에 오른 기분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신 마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추(鄒) 땅의 성인 맹자께서 이른바 태산을 끼고서 북해를 뛰어넘는다고 한 기상과, 장자(莊子)가 해와 달의 곁에 가서 우주를 껴안는다고 한 기개를 나도 느낄 수 있었다”고 감회를 표출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는 주요 목적 중 하나이다.
[의의와 평가]
「청학동록」을 통하여 일생 동안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재야 지식인이 이상향이라 일컬어지는 하동군의 청학동 절경을 찾아 위로받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까지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에 불일암, 칠불암, 신흥암 등의 사찰이 여전히 융성하였음을 보여 주며, 특히 내원암에 대한 기록은 「청학동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정식 일행이 쌍계사에서 내원골과 향로봉을 거쳐 불일암으로 오른 코스는 현재 알려지지 않은 길이어서 청학동 유람 코스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