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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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贊武 妻 柳氏 孝行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Gim Chanmu's Wife Yu Cla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산41-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용규 |
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산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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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효열비 |
관련 인물 | 진양 유씨(晉陽柳氏)|김찬무(金贊武)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8㎝[높이]|42㎝[너비]|18㎝[두께]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진양 유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후손들이 진양 유씨(晉陽柳氏)의 효열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에 효열비를 세웠다.
[위치]
김찬무 처 유씨 효행비(金贊武妻柳氏孝行碑)는 갑정마을에서 월운마을로 가는 도로 변인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산41-1 에 있다.
[형태]
비석의 몸돌과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팔자형의 비석 덮개가 있으며,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8㎝, 너비 42㎝, 두께 18㎝이다.
[금석문]
비의 정면에는 ‘유인 진양 유씨 효열사적비(孺人晉陽柳氏孝烈事蹟碑)’라 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은 유번(柳藩)의 후손이며 유의경(柳宜警)의 딸이다. 1831년(순조 31)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름답고 순하여 여자로서의 덕행을 갖추었다. 13세에 어머니 한씨(韓氏)가 중병이 드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가 거의 돌아가시게 되자 집이 떠나도록 큰소리로 울면서 손가락을 찧어 피를 어머니 입 안에 흘려 넣어 회생시켰다. 그 후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찬무(金贊武)에게 시집갔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였다. 부인은 몸소 천한 일을 부지런히 하여 살림을 살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니 부인의 법도에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염병에 걸려 닷새째 되는 날 병세가 위급하였다. 부인이 자리에서 놀라 일어나 곧 허벅지 살을 베어서 구워 자기가 씹어 그 침을 입 안에 넣어 주니 소생하였다. 그러나 겨우 3일을 더 살다가 도로 병세가 심해지자 다시 손가락을 찧어 피를 입안에 흘려 먹이고 하늘에 빌어 대신 죽기를 원하였다. 이로부터 남편 병세가 호전되어 병이 나았다. 뒷날 집안의 사람이 돗자리 밑에서 놋줄을 발견하고. 그것이 부인이 남편이 죽으면 목을 매어 따라 죽으려 준비해 둔 것임을 알고 서로 바라보고 놀라 탄식하였다. 어머니께 효도하고 남편에게 절개지킴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여 고을 선비들이 여러 번 도 감사에게 표창하도록 올리고, 어사(御使)에게도 알려 표창을 받았다. 이에 후손은 조그마한 비를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조비(祖妣)의 효열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의의와 평가]
김찬무 처 유씨 효행비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은 여성의 행적을 적고 있다. 오늘날은 유씨가 살던 시대와 달라 그때와 같은 효도와 정절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남편에 대한 공경과 사랑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유씨의 행적은 인륜과 도덕이 해이해진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