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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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梁鎭-鳴梁-海南-國難克服史- |
영어공식명칭 | From Dallyangjin to Myeongnyang, History of Overcoming National Crisises in Haena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조선시대 해남에서 일어났던 달량진왜변과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
[전략적 지세를 갖춘 요충지, 달량진과 명량]
해남의 역사를 조명할 때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하나는 수군제도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쾌거이다. 전자는 16세기 중반 제승방략제라는 전쟁 방어 체제의 배경이 된 1555년[을묘년]의 달량진왜변이고, 후자는 정유재란의 전황을 바꾼 위대한 대첩으로 알려진 1597년의 명량해전이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이 있었던 이유는 해남 지역의 지리환경이 왜군들의 해상으로부터의 침입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달량진은 현재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는 수군진성으로 해남과 완도를 연결하고 있었다. 특히 해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달량진을 장악하면 강진, 영암 지역으로 상륙하여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편 명량은 수심이 얕고 폭이 좁아 밀물과 썰물 때 바닷물이 좁은 해협을 지나며 급류를 이루는 곳이었다. 명량해협에는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어 급류를 이루는 물살이 소용돌이치기도 하였다. 이곳은 왜구들이 서해안으로 진입할 때 지름길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동시에 조수의 간만 때 급류가 도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일본수군과 대치하기에 적합한 지세이기도 하였다.
해남의 달량진과 어란포, 명량 등은 안보상으로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함으로써 당시 왜구들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해남현감을 비롯한 현민들은 이를 잘 극복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을묘년의 달량진왜변에서 보여 준 해남현민의 활약은 42년 후에 있었던 정유재란 중 명량해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국난 극복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을묘왜변보다는 달량진왜변으로 불러주세요]
해남 땅끝 해안로를 타고 가면 이진성을 지나 달량진성에 도착한다. 땅끝마을과 가까운 곳에 두 곳의 수군진이 있다. 고지도에 나란히 그려져 있는 이진성과 고(古) 달량진성이다. 이진성 입구에는 초등학교 앞에 만호비 몇 기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수군만호진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정유년 『난중일기』에도 기록된 곳이다. 허물어져 가는 성축 일부와 수군진성에서 군졸들이 이용하였을 우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달량진성에는 그림 같은 넓은 포구에 해안로를 따라 테크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테크 끝에 망루(望樓)가 복원되어 있다. 그 해안로를 따라 달량진성의 옛 모습을 기억시키고자 성벽을 쌓아 일부 복원하여 놓았다. 해월루(海月樓)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저 앞에 달도가 보이며 완도의 상왕봉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멀리 제주도가 가물거린다. 가히 땅끝 수군진이다. 해로를 통해 육지에 상륙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고지도에도 고달량진지관애요충지(古達梁鎭地關隘要衝地)라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를 오가는 배를 타기 위해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던 곳이 달량진이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37년 전 1555년(명종 10) 5월 11일[양력 5월 30일] 왜구는 7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해남과 완도 사이의 해로를 통하여 달량진에 침입해 왔다. 이들은 달량성 좌측의 이진포와 우측의 달량포에 각각 상륙하여 성저의 민가를 불태우고 달량성을 곧 포위하였다. 그러나 병선 11척 규모의 왜구만 조선군에게 식별되었고, 이러한 사실만이 가리포첨사 이세린(李世麟)에 의해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績)에게 보고되었다.
원적은 이를 진압할 수 있는 인원을 200여 명으로 판단하여 즉각 전투 지역으로 이동시켰고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자신도 현장에 출동하였다. 그러나 왜구는 원적 등의 지원세력이 달량성에 입성하자마자 증강된 병력으로 이들을 6겹으로 포위하였다. 왜구는 처음에 나타났던 11척 외에 60척의 왜선이 더 나타나 달량성을 포위했던 것이다. 왜군의 병력은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을 보면 1,500명 정도였다. 원적이 이세린의 보고를 통해 인지하였던 것보다 침략세력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달량성은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강진의 병영과 직선거리 30㎞ 이상 떨어진 지역이므로 신속한 육군의 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지원세력의 주가 되었던 장흥과 영암 또한 강진보다 후방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왜구는 조선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주요 거점과 요로를 장악하고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왜구들의 공격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어 시행되었다. 당시 해남현감 변협(邊協)과 무장현감 이남(李楠)이 달량성의 상황을 인지한 후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이들을 구원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왜구들의 매복에 걸려 격파되었고 이남은 이 교전에서 전사했다. 또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김빈(金贇)과 진도군수 최린(崔潾) 역시 어란포 일대에서 왜구에게 패하여 구원에 실패하였다.
구원군이 차례로 격파되고 달량과 같은 작은 성에서 전투를 지속하는 것이 제한된다고 생각한 원적은 협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행동은 오히려 왜구에게 조선군의 약점을 노출한 꼴이 되었다. 왜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총 공격하여 달량성을 함락시켰다. 결국 이 전투에서 원적과 한온은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덕견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달량성을 점령한 왜구는 이미 방어체계가 무너진 인근 군현들을 각개 격파하며 세력을 확장시켰다. 우선 진도로 이동하여 남도포와 금갑포를 모두 함락하였다. 이어서 해남으로 진주하였지만 해남현감 변협과 남도포만호 송중기(宋重器)가 적은 군사임에도 불구하고 지켜 냈다. 그러나 왜구는 지속적으로 인근 지역에 진출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5월 21일에는 전라병영이 위치한 강진을 거쳐 전라도 병영의 병기와 군량미 700석을 약탈하였으며 이후 장흥까지 진출하였다. 이처럼 달량성에서의 승리 이후 왜구는 분산된 형태로 활동하며 영암 이남의 각 지역을 계속하여 약탈하였다.
한편 5월 16일 전라도의 왜구 침입 상황을 보고 받은 조정은 급히 토벌군을 편성했다. 최고 사령관인 전라도도순찰사에 이준경(李浚慶)을 임명하고 방어사에는 좌도에 남치근(南致勤), 우도에 김경석(金景錫)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라도의 진병(鎭兵)만으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과 전라도의 산관, 한량, 무사들을 선발하여 전력을 보강하도록 하였다.
5월 24일 왜구의 주력이 영암향교를 점령하고 영암향교를 본부로 하여 영암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왜구가 영암을 포위한 다음날인 5월 25일 남치근과 신임 전라병사 조안국(趙安國)이 나주를 지나 영산포로 진격하였다. 영암성에 있던 왜구는 조선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 1,000명의 부대를 나주로 파견하여 토벌대의 진로를 봉쇄하게 하였다. 남치근 부대는 왜구를 보자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진격을 멈추었다.
영암성에 남은 왜구는 토벌군이 오기 전에 영암을 탈취하기 위해 동문에 모여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영암성의 장졸과 주민은 이윤경의 지휘 아래 맹렬하게 싸워 왜구를 격퇴하였다. 왜구의 세력이 약해지자 적극적으로 공세로 전환하였다. 성 안에서 왜구의 공격에 활로 응사하다가 화전까지 쏘았는데, 마침 서풍이 강하게 불어 왜구의 진영을 불태웠다. 왜구가 동요하자 이윤경은 적진으로 돌격하였는데, 이에 왜구는 패하여 달아났다. 나주에서 돌아온 왜구들도 영암성의 패전 상황을 보고 바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약 반 달가량 진행된 달량진왜변은 종식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조선 측 피해자는 호남지방에서만 전사자가 161명, 민간인 희생자가 340명으로 총 510명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해남현감이 적은 병력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 주목된다. 달량진왜변은 쓰시마정벌 이후에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왜구의 침공이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조선 방어체제의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된 사건이었다. 진관체제의 협력 방어 체제는 대응 태세가 느리다는 약점 외에 조선군의 집결지와 진로가 적군에게 완전히 예측된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였다. 그것은 한순간에 전라도의 방어체제를 붕괴시키고 군사력의 진공상태를 낳았다.
결국 달량진왜변 이후 조선은 진관체제의 문제를 인정하고 새로운 병력 동원 체제와 방어전술을 모색하였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전술이 제승방략이다. 그러나 피역과 군비 부족, 전력의 전반적 하락에 대해서는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수군 전력에서는 을묘왜변이 중요한 변화의 자극제가 되었다. 달량진왜변에서 왜구는 수군전술에서도 개량을 가하였다. 조선의 대형 전선을 상대하기 위해서 배를 대형화하고 총통에 대한 방탄력을 높이기 위해 뱃전도 튼튼하게 만들었다. 왜구의 변화와 개량 전술에 놀란 조선은 전선을 보다 대형화하고 왜구의 등선백병전에 대체할 신형 전선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달량진왜변 후 새로운 전선이 만들어졌는데 그 결과물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시기 주력 군선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도 판옥선의 우수성에 힘입은 바가 컸다.
[명량해전의 승리와 해남민들]
해남 문내면 선두리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 앞에 잠시 멈춘다. 해남에서 추자도를 경유하여 제주도로 가는 퀸스타 2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루에 1회 운항하기에 우수영여객선터미널 앞 새롭게 단장한 넓은 주차장에는 대형버스가 즐비하다. 오늘도 제주도로 갈 배는 만석인가 보다. 그러나 오늘 탈 배는 왼쪽 편에 있는 울돌목 거북배 유람선이다. 아직 출발 시간이 남았기에 선두리 우수영문화마을을 둘러본다. 1597년 정유재란기의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가 된 곳이 우수영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명량해전이 벌어진 그날의 상황이 골목 여기저기 볼거리 가득하게 조형물로 배치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에서 마을 쪽으로 걸어가니 새롭게 이전한 충무사가 보였다. 그리고 명량대첩의 승전을 오래전 기억하고자 해남 명량대첩비가 당당하게 서 있다. 충무사에 들어가 향을 사르며 눈을 감고 그날의 이순신을 만나러 떠나 본다.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의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선 160여 척 중 해전 초기에 도주한 배설(裵楔)이 거느린 10여 척의 전선이 조선 수군의 명맥을 지탱하고 있었다.
1597년 7월 22일에 패전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기용하였다. 아울러 역시 같은 해전에서 전사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후임으로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하였다.
당시 경상도 초계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통제사 재임명의 교서를 받은 것은 8월 3일이었다. 이후 전라도로 서진하면서 수군을 정비해 나간 이순신은 8월 24일 해남현 어란포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12척의 전선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어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거느리고 온 전선 1척이 추가되어 총 13척의 전선이 확보되었다.
어란포에 머물러 있던 중 1597년 8월 28일에는 일본군 정탐선 8척이 침입하여 왔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두에 위치한 가운데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8월 29일에는 진을 벽파진으로 옮겼다. 벽파진에 유진 중이던 9월 7일 일본 군선 12척이 침입하였다. 이때도 이순신 대장선이 선두에서 적을 쫓음으로써 장졸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전의 준비를 다하고 있을 무렵인 1597년 9월 14일에 일본 군선 200여 척 중 55척이 먼저 어란 앞 바다에 도착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9월 15일 벽파진에서 해남 땅 주량에 위치한 전라우수영 앞으로 진을 옮겼다. 이순신이 진을 옮긴 이유는 벽파정(碧波亭)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조선 수군으로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피력하였다.
당시 일본의 수군은 7,000여 명의 병력으로 8월 13일 하동현의 두치진에 상륙하여 좌군 주력과 합세하여 남원성을 함락한 후 좌군에의 예속을 벗어나서 하동현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일본의 수군장수들은 수군을 지휘하여 좌군의 육상 침략전에 호응하기 위하여 해로를 따라 진도 이서 지구를 침공하기로 하였다.
이런 전략으로 일본 수군의 본대는 8월 하순경에 하동현의 섬진강 하구를 출발하여 9월 7일에 어란포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받은 조선 수군은 9월 15일 진을 우수영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량이라는 천험의 요새지 특성을 잘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었다. 아울러 당시 일본군의 전선은 총 200여 척으로 판단되며, 그중 명량수로에 진입하여 조선 수군과 접전을 벌인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0여 척이었다.
9월 16일 이른 아침에 일본 수군이 명량을 거쳐 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사전 약속된 전술을 강조한 후 전투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 지휘부는 적선이 조선 전선의 10배 이상 되는 대규모이므로 연해 피난선 100여 척을 동원하여 후방에서 포진하도록 하였다. 일종의 의병전술(疑兵戰術)인 것이다. 여기에는 해남현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운용하던 향선도 다수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휘하 13척의 전선 중 12척은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였다. 이때 진을 친 곳은 명량수로의 최협부가 아닌 양도 북방을 경계로 더 넓은 해역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이순신 대장선은 최선봉에서 일본 함대와 접전을 벌였다. 조선 수군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8시 전후로 추정된다.
명량해전 초기에는 휘하 전선들은 뒤로 물러난 가운데 이순신 대장선만 선봉에서 홀로 버티면서 화포를 쏘면서 교전하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이 합류하여 힘써 싸웠다. 이후 오후에는 조류가 바뀜으로써 이를 이용한 전술을 구사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쳤다.
하루에 3회 운항하는 울돌목 거북배에 올랐다. 명량(鳴梁)의 한글 풀이가 울돌목이란다. 서서히 배는 진도 벽파정을 향해 출발한다. 거북배 선상에 오르니 마치 해전이 벌어진 그날 조선 수군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는 기분이다. 우리의 대장 충무공 이순신의 고함이 들린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조금도 물러서지 말라.” 그날의 안위도, 김응함도, 김억추도 그리고 해남의 해상의병도 모두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해전 결과 일본 수군의 전선 31척이 완전히 분멸되었으며, 다수의 전선이 파괴된 채 일본 수군은 남해상으로 후퇴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다만 근접전을 수행함으로써 수군과 의병을 포함하여 다소의 인명 피해는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량해전의 승리는 당시의 전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의 승승장구하던 기세를 일시적으로 꺾음으로써 당시 조명 연합군의 대일본군 방어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 수군 운용에 있어서도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먼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조선 수군이 겨우 수습된 전력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후 수군력 재건의 기반이 되었다.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이 절대 열세한 상황에서 승리를 거둔 특별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민과 군이 협조 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통합적 역량을 발휘한 해전이었으며, 수군 지휘관 이순신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인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명량해전에 부여할 수 있는 독특한 의미라 할 것이다.
해남 우수영 항에서 출발한 울돌목 거북배가 진도 벽파정 앞에서 선회한다. 그날의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거북배가 돌아 다시 출발지를 향해 서서히 출발한다. 이제야 진도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에 전라우수영 관광단지도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이 오후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다. 그날의 승리는 호남 모두의 승리이자 조선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