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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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98년경 창건 - 함양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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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73년 - 안의향교 |
함양향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원교길46-7[교산리 794] | |
안의향교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향교길 15[교북리 148-2]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 및 활동 제반.
[개설]
함양군의 유교 내지 유학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사상적인 토대로서 정치와 교육 등 사회 모든 부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성리학의 보급 및 발전의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여말선초의 유학]
왕조가 교체되는 여말선초 시기 함양군에는 박충좌(朴充佐), 조승숙(趙承肅)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은둔하며 교육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양군에는 고려 유신들의 은거처가 곳곳에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유신들 중에 유환(劉懽)은 안의면 금원산 아래에 은거하였고, 박덕상(朴德祥)은 안의면 황곡에 은거하였다. 김현(金峴)은 안의면 금천에 와서 은거하였으며, 박흥택(朴興擇)은 판서를 지냈으나 함양군 백전면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함양오씨의 후손인 오상덕(吳尙德) 역시 고려 말 예문관제학을 지냈는데,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오지 않고 치악산에 들어갔다가 용성부로 옮겨서 충절을 지켰다. 개경에 있던 김광저(金光儲)도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는데 안의면으로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김순(金順)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은거하였다. 목은 이색(李穡)이 함양군의 화장산 아래에 있는 유림면 국계마을에 와서 우거할 때 제계서재(蹄溪書齋)를 짓고 강학하면서 만년을 보낸 기록이 있다. 특히 조승숙은 교수정(敎授亭)을 지어 함양군의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함양군이 유교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승숙은 덕곡에 교수정을 지어 후진을 교훈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였는데, 한때는 경향 각지의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는 훌륭한 문인이 많았다. 이렇게 함양군은 여말선초 왕조교체 시기에 학자들을 중심으로 유교 문풍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학문을 숭상하는 지역으로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향교와 서원]
함양군의 유교 보급과 발전에는 향교와 서원의 역할을 들 수 있다. 향교로는 함양향교와 안의향교가 있다.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있는 함양향교의 설립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조승숙의 명륜당 기문으로 보아 1398년(태조 7)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 건국 초 함양군에는 고려 시대 소소당이란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소소당에 함양향교가 설립되었다고 전한다. 안의향교는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에 있다. 1473년(성종 4)에 현감 최영이 공자의 사당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신윤환이 현감으로 와서 낙성하였는데, 기문은 김종직이 썼다. 조선 건국 후 80여 년 뒤로 비교적 늦게 창건되었으나 관립 유교 교육기관으로 서상·서하·안의·마리·위천·북상 지역 유생들의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성리학의 교리와 학문적 지도에 임하여 많은 유생을 배출하였다.
함양군의 2곳 향교에서는 춘추로 향사(享祀)하고, 공자의 덕을 추모하였다. 향교의 공간은 공자를 모신 대성전, 유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명륜당, 거처하는 재(齋)로 나누어져 있다. 대성전 내의 문묘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공자의 위패를 정중앙으로, 4성(四聖)인 안자·증자·자사·맹자, 공문10철(孔門十哲)과 송조6현(宋朝六賢),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좌우로 모시고 있다. 향교의 관리는 전교(典敎)와 장의(掌議)가 맡고 있다.
함양군의 서원으로는 남계서원을 비롯하여 청계서원·구천서원·도곡서원·송호서원 등 여러 곳이 있다. 함양군 관내에 건립된 서원에서는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향교와 더불어 유학 발전에 많은 역할을 맡았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교육한 사설 유교 교육기관으로 관립 유교 교육기관인 향교와 내용면은 비슷하다.
[유학자들]
함양군의 유교 내지 유학의 발전과 관련해서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활동이 주목된다. 김종직은 15세기 후반에 영남사림파의 영수였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약 5년간 많은 문인을 양성하였고, 정계에도 진출시켰다. 유호인(兪好仁)[1445~1494]을 비롯하여 정여창·표연말(表沿末)[1449~1498]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김굉필(金宏弼)[1454~1504]·조위(曺偉)[1454~1503]·김일손(金馹孫)[1467~1498] 등이 함양군에 와서 김종직 밑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다음 해부터 후학을 가르쳐 학문의 꽃을 피웠으니, 이로부터 함양군의 유교는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정여창·유호인·표연말 등 학자가 배출되었고, 당곡 정희보(鄭希輔)[1488~1547]·노진(盧禛)[1518~1578]·이후백(李後白)·양희(梁喜)[1515~1580] 등 명신과 청백리가 나왔다. 또한 유호인·노진·강익(姜翼)[1523~1567] 등 시조시인이 있고, 강한(姜漢)[1454~?]·조식(曺湜)[1526~1572]·최수현(崔守鉉) 등 명필이 배출되었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함양군의 유교 내지 유학의 수준 정도를 가늠해 주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겠으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200여 명의 문과 급제자와 100여 명의 무과 급제자가 나왔다. 그리고 『함양군지』와 『향교지』 등에 따르면 소과의 생원·진사과에 합격한 인물들이 530여 명에 이른다.
함양군은 조선 시대 유교 학문을 발전시키고,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명현거유(名賢巨儒)[인격적으로 덕이 높고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 존경을 받는 대유학자]의 지역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