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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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陵墓 |
영어공식명칭 | Neungmy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진규 |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조선 시대 왕족의 무덤.
[개설]
능묘는 왕과 왕비, 그리고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뜻한다. 능원(陵園), 능원묘(陵園墓)라고도 한다.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뜻하며, 원(園)은 왕의 사친(私親)[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왕세자와 왕세자빈·왕세손의 무덤을 일컫는다. 묘(墓)는 대군·군·옹주·후궁 등 나머지 왕족의 무덤이나 폐왕의 무덤을 뜻하며, 일반적으로는 사대부의 묘를 일컫는다. 경기도 화성시의 대표적인 능묘로는 '화성 융릉과 건릉'이 있다. ‘화산’이라 불리는 해발 108m 정도의 낮은 구릉지에 조성되어 있다.
[융릉]
융릉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와 사도세자의 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1735~1815]의 무덤이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자, 영조는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 장사지내고 사도라는 시호와 수은(垂恩)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수은묘는 원(園)으로 격상시켜 영우원(永祐園)으로 불렀다.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부로 천장하고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으나, 왕으로 추존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1899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건릉]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1753~1821]의 합장묘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9년(영조 35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76년 즉위하였으며, 재위 24년인 1800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의왕후 김씨는 1762년(영조 38년)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정조가 즉위한 후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지극히 모셨다고 전한다. 1821년(순조 21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건릉에 합장되었다.
[형태]
융릉과 건릉은 11년 차이를 두고 조성되어 거의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융릉은 묘의 방향이 남서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봉분 주위에는 ‘ㄷ’자 형태의 곡장(曲墻)이 둘려 있으며, 내부에 봉분과 석물이 조성되어 있다. 원형 봉분의 하단에는 병풍석이 둘려 있다. 보통 능의 경우 병풍석과 난간석을 같이 조성하거나 난간석만 사용하는데, 융릉은 특이하게 병풍석만 배치하였다. 봉분 뒤편에는 석호와 석양이 1쌍씩 배치되었고, 봉분 정면에는 혼유석, 장명등이 놓였다. 정면 양옆으로는 망주석 1쌍이 배치되었고, 망주석 앞으로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가 1쌍씩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보통 왕릉에서 석수는 2쌍씩 놓이는데, 융릉은 '원'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1쌍씩 배치되었다. 석수의 놓인 자리가 봉분의 뒤편에 몰려 있어 부자연스러운데, 후에 왕릉급으로 격상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자리를 비워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건릉은 묘의 방향이 정남향으로 조성되어 융릉과 차이가 있다. 봉분 주위에는 ‘ㄷ’자 형태의 곡장(曲墻)이 둘려 있으며, 내부에 봉분과 석물이 조성되어 있다. 원형의 봉분 하단에는 난간석이 둘려 있다. 봉분 정면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봉분 주변에 석양과 석호가 2쌍씩 배치되어 있다. 정면 양옆에는 망주석 1쌍, 석마 2쌍, 문석인과 무석인이 배치되어 있다. 건릉의 문석인은 융릉과 마찬가지로 '금관조복형(金冠朝服型)'으로 조성되었다. 융릉의 문석인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이고 둔중해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실증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화성 융릉과 건릉'에 배치된 석조물은 조선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묘사를 하였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표현이 이전 시기에 비해 자연스럽고 실증적인 것은 당시 사실적인 화풍이 유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석물 조각에서 보이는 회화적이고 유연한 표현은 정조 시기 화원 제도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석물에 반영된 이러한 분위기는 1757년(영조 33)에 조성한 홍릉(弘陵)[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의 무덤]의 문석인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융릉과 건릉은 석물의 표현이 거의 유사하다. 융릉은 왕릉보다 등급이 한 단계 떨어지는 '원'으로 조성되었지만, 건릉과 비교하여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석물의 조성에 공을 들였다. 이러한 점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 그만큼 많은 정성을 들였기 때문일 것이고, 석물을 조성한 장인도 이러한 점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