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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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至誠-感天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영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0년 6월 19일 - 「지성이면 감천」 박성석으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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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6월 20일 - 「조암리를 중심한 전설」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
채록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오원군의 아들 |
모티프 유형 | 효행담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리에서 전승되는, 효자가 벼락으로 보물을 받은 이야기.
[개설]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호종한 호성공신으로 3등공신을 책봉 받은 오원군(鰲原君)의 신원은 『선조실록』175권의 자료[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 기사에 해당]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름은 박충경(朴忠敬)에 해당한다. 한편 박충경의 본관은 경주 박씨로 나오는데, 조상의 효행담을 구연한 설화의 제보자는 자신이 밀양 박씨이고 오원군이 13대조라고 하였다. 실록의 기록에는 공신이 된 박충경이 내시(內侍)라고 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내시는 환관(宦官)으로 궁 밖에서 거주하며 궁으로 출퇴근하였고, 아내와 양자를 두어 가계(家系)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2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지성이면 감천[효자]」라는 제목으로 453~456쪽에 수록되어 있다. 1980년 6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장덕1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박성석[남, 73세],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임진왜란 때 선조의 파천을 모시고 삼등공신이 된 오원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오원군은 선조를 따라 떠났고, 오원군의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양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난리통에 내려온 피난살이로 인해 먼저 살고 있던 송씨와 윤씨네 집에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다. 그런데 육칠월 장마철이 되자 일거리가 없어 어머니 봉양이 힘들어졌다. 품삯이 없어 사오일을 넘게 굶고 있는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와서 먹을 것을 게워 냈다. 토한 것을 보니 보리쌀이었다. 오원군의 아들은 여러 날 굶고 계신 어머니께 보리쌀을 잘 씻어서 끓여 드렸다. 그리고서는 일을 하러 마을의 논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벼락이 쳤다. 벼락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치자 한 노인이 나서 “죄 지은 사람에게 벼락불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죄인은 논두렁으로 나오시오. 죄인 때문에 다른 사람도 벼락을 맞아 다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오원군의 아들이 ‘개가 게워 낸 더러운 토사물로 어머니를 봉양한 것이 죄가 되어 나에게 벼락이 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논두렁으로 나섰다. 그랬더니 벼락이 아들의 몸을 휘감아 안더니 한 바위에 내려놓고 막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참 벼락이 내린 후 동네 사람들은 벼락을 맞고 죽었을 거라 생각하여 장사를 지내주고자 하였는데, 오원군 아들이 죽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사람들이 온몸을 주무르자 오원군 아들의 정신이 깨어났는데, 그 곁에 보물이 놓여 있었다. 이에 오원군의 아들은 보물을 팔아 땅을 사고 그 마을에서 계속 살아갔다. 그때 오원군 아들에게 벼락이 내려친 바위를 벼락바위라 부른다.
[모티프 분석]
「지성이면 감천」의 모티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먼저 하나는 효자가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효도를 실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효자의 효행에 하늘이 감동하여 벼락으로 보물을 내려주는 것이다. 오원군의 아들은 어려운 피난살이 중에도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일반적인 봉양과 효도는 좋은 것을 가려서 챙겨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없어 계속 굶게 되자 개의 토사물에서 곡식을 찾아 깨끗이 하여 끼니를 봉양한다. 표면적으로는 더럽고 불결한 것이나 이면적으로는 고정관념을 깨고서라도 최선을 다해 봉양을 실천한 것이다. 이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속담이 있듯 효자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을 통해 보물을 상으로 받게 된다. 이때 토사물을 게워내는 개의 등장은 가난한 오원군의 아들에게 조력자이자 효행의 지극정성을 증명하는 단계로 작용한다. 그리고 벼락은 오원군 아들에 대한 하늘의 심판 결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을사람들과 오원군 아들은 벼락을 벌로 이해했다. 그러나 벼락은 효자 오원군 아들을 가려내고 보물을 내려주는 하늘의 수단이자 방법이다. 자신의 효행에 대해 부족하다 평가하고, 반성하는 겸손한 자세로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긴 아들은 벼락을 맞고자 자청하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벼락이 더 이상 내려치지 않도록 하려는 희생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로써 죄인의 악행이 아닌 효자의 선행에 대한 벼락은 벌이 아닌 상으로 기능한다. 이때 벼락바위는 벼락을 통해 하늘의 보물을 받은 것에 대한 구전의 증거물이며, 오원군 아들의 이야기는 벼락바위의 지명유래 전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