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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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寒泉農樂-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경엽 |
[한천 농악이 성립되기까지]
한천 농악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 한천 마을에서 전승되어 전라남도 무형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농악이다. 한천 농악의 유래에 대해 한천 마을이 과거에 역촌(驛村)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기록이나 근거는 없다. 다만 전해져 오는 역대 상쇠들의 계보를 보면 19세기 말의 인물들이 초기 상쇠로 거론되고 있으므로, 한천 농악의 성립도 19세기 말 무렵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천 농악의 전승 계보]
전승되고 있는 한천 농악의 상쇠 계보를 보면 강병서·전치언·장동지·정서익·이선일·김복동·박천한·노판순·전전박·노승대를 거쳐 2013년 현재 박춘백[1954~]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대 상쇠 중에서는 이선일[1895~1959], 박천한[1915~1984], 노판순[1919~1992]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전한다.
한천 농악은 20세기 중반부터 체계화되었다. 1950년대 후반 젊은이들이 농악계(農樂契)를 만들어 이선일 상쇠에게 배우며 활발한 전승이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1962년에 열린 제1회 전라남도 민속 예술 경연 대회와 1963년에 열린 제2회 전라남도 민속 예술 경연 대회, 1968년에 열린 제9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천한 상쇠가 받은 상장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1964년에 열렸던 제5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고도 전해진다. 즉, 1960년대는 한천 농악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 무형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한천 농악의 연행 양상]
한천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 무렵에 짧게는 1~2일, 길게는 일주일 이상 농악을 하고 논다. 연행 내용을 보면 일곱 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어울림과 영제(令祭), 들당산, 철룡굿(天龍굿), 마을 샘굿, 마당밟이, 판굿, 날당이 그것이다.
판어울림은 농악판이 어우러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과정이다. 굿을 친다는 것을 주위에 알리고, 먼저 나온 치배들이 손을 맞춰 보면서 농악 연행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농악대가 일채를 치면서 원을 그리며 돌다가 판어울림 가락과 삼채 등을 몇 차례 반복해서 친다. 판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 영기(令旗)와 농기를 세워 놓고 제상을 차린 후에 영기를 향해 지내는 제사인 영제를 지낸다. 영제는 대포수가 주재한다.
‘들당산’이란 일반적으로 다른 마을에 걸궁(乞窮)을 치러 들어갈 때 그 마을 당산에게 인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천에서는 마당밟이를 하기 전에 신을 모셔 오는 과정을 들당산이라 한다. 들당산을 하는 장소는 ‘숲에’라고 부르는 곳으로 이곳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들당산 굿을 친다.
철룡굿은 농악대가 마을 뒷산인 뒷메를 향해 서서 치는 굿이다. 한천에서는 마을 뒷산을 철룡이라고 지칭하고 산을 향해 인사하는 것을 철룡굿이라 한다. 풍수적으로 볼 때 마을 뒤에 자리한 뒷메를 지맥(地脈)의 근원으로 보고 각별하게 여긴다. 농악대가 뒷메를 향해 늘어서서 인사를 3번 한 다음, “가강 치배 문안이요”라고 인사를 한다. 이어 삼채·갠지갱·휘모리·다스름·삼채·영산 다드래기[삼채형 짝드름·휘모리·다스름·자진모리형 짝드름·휘모리·다스름·휘모리형 짝드름·휘모리·다스름]·쟁열두머리·휘모리·삼채·갠지갱·휘모리·된삼채·갠지갱·휘모리·된삼채·갠지갱·휘모리·인사굿 순으로 가락을 연주한다. 가락 구성은 반복적으로 연행되는 일종의 공식적 표현 단락이다. 철룡굿이 끝나면 다시 길굿을 치면서 샘으로 이동한다.
마을 샘굿은 마을 공동 우물에서 치는 굿이다. 샘굿은 찬시암굿·동청시암굿·버버리시암굿·온뜰시암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천에는 샘굿을 하는 곳이 네 군데이다.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찬시암이며, 이어 동청시암·버버리시암·온뜰시암 순으로 샘굿을 친다. 각 샘마다 치는 가락은 동일하다. 샘굿 가락을 치고 휘모리로 몰아가 끊고, 이채를 치고 영산 다드래기를 하고 끝낸다. 샘굿 가락에는 ‘물 주소 물 주소 시암 각시 물 주소. 건너가 건너가 또랑각시 건너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당밟이는 개인 가정의 액막이를 위해 치는 농악이다. 문굿·샘굿·장꼬방굿·조왕굿·성주굿·마당굿[구정놀이]·인사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굿을 치고 이동하다가 대문 앞에 다다르면 문굿을 친다. 이어 집안으로 들어가 집안 곳곳을 다니며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굿을 친다. 다만 사정에 따라 마당밟이의 순서는 달라질 수 있다.
판굿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판어울림굿을 치고 순서대로 채굿을 연행한다. 채굿은 일채부터 칠채까지 일곱 개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채굿마다 대표적인 굿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어 순서에 맞춰 판굿이 진행된다.
한천 농악 판굿의 ‘채’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판굿의 구성 단위인 채굿이다. 채는 징을 치는 숫자를 말하며 징을 세 번 치면 삼채이고, 네 번 치면 사채라고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판굿 구성 단위의 채굿에서 말하는 ‘채’란 개별 가락 이름이 아닌 판굿의 과정을 지칭한다. 한천 농악의 판굿은 일곱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면들을 지칭할 때 일채부터 칠채까지 구분해 부르는 것이다. 각각의 채굿에는 그 굿을 대표하는 가락이나 놀이들이 연행된다. 예를 들어 이채굿에서는 풍년굿을 치고, 삼채굿에서는 호호굿을 치고, 사채굿에서는 노래굿을 하고, 오채굿에는 도둑잽이를 하는 식이다. 이처럼 한천의 판굿은 채굿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른 지역 농악과 달리 일채부터 칠채까지 일곱 개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채굿 안에 특별한 가락이나 놀이가 들어 있어서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 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채굿은 도입 부분에서 해당 채 가락을 연주하고 이어 대표 가락이나 놀이를 연행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일채굿에서는 ‘영산 다드래기·28수·열두머리’ 등으로 구성된 가진가락 한 세트를 연주한다. 이채굿에서는 도입 가락을 친 후 풍년굿 가락을 연주하고, 삼채굿에서는 도입 가락 후에 호호굿을 연주한다. 그리고 사채굿에서는 사채와 가진가락 세트를 연주한 후에 소고놀음·북놀음·장구놀음 등의 구정놀이를 연행한다. 오채굿에서는 노래굿을 하고, 육채굿에서는 가진가락들을 연주한 후에 잡색들이 도둑잽이를 한다. 마지막으로 칠채굿에서는 치배들이 등을 맞대고 노는 등밀이굿을 한다.
날당산은 판굿을 치고 난 다음날 아침에 친다. 날당산을 위해 판굿을 마친 장소에서부터 굿이 시작된다. 농악대는 길굿을 치면서 일렬로 마을을 빠져 나간다. 가는 도중 삼거리나 사거리를 만나게 되면 잡귀·잡신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반드시 원진을 한 차례 한다. 잡귀·잡신을 몰아내는 의미로 좌편으로 방울진을 세 번을 싸고, 일렬로 늘어서 오채부터 순서대로 가락을 풀어서 가진 굿을 친다. 이 때 영산 다드래기·28수·열두머리 등의 가락을 빠짐없이 친다. 이렇게 한 후에 상쇠가 포수를 데리고 멀리 나가서 발림을 하고 있으면 부쇠가 치배들을 데리고 상쇠와 잡색이 있는 곳에 합쳐서 한바탕 친다. 그리고 철룡을 향해 ‘갱갱갱갱’ 난타를 하면서 인사를 세 번 하고, “가강치배 하직 문안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굿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는 볏짚 한 단에 불을 붙여 놓고 전 치배들이 그 불을 뛰어 넘어온다. 마을로 돌아올 때에는 악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동한다.
[한천 농악의 민속 문화적 의의]
한천 농악은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농악 중 하나이다. 한천 농악은 11대에 걸친 상쇠들의 전승 계보에서 볼 수 있듯, 전통이 깊고 기예와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농악으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인 마을 농악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고 대외적 활동을 통해 축적된 예술적 표현 방식이 풍부하다는 점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