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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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契丹蒙古-侵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문안식 |
[정의]
고려 시대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 거란·몽골이 침입한 사건.
[거란의 침입]
고려 시대는 많은 외침을 겪었던 시기이며 전기를 대표하는 것이 거란[契丹]의 침입이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에 서희(徐熙)의 담판을 통해 막아내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宋)과 계속 교류하였고, 강동 6주 역시 전략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거란은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거란의 제2차 침입은 거란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왔으며, 강조(康兆)가 거느린 고려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후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인 현종은 공주와 삼례를 거쳐 나주까지 피난하였고, 병참선이 차단된 거란군은 고려 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은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전투를 벌여 이를 궤멸시켰다. 이후 오랜 전쟁이 끝나고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의 연호 사용을 멈추고 거란이 세운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쳤다.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 6주의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인종 3)까지 양국 사이에는 사행 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다.
화순 지역은 국토의 남쪽에 자리하여 세 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부담하는 등 많은 고통을 당하였고, 장정들은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희생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거란의 침입 이후로도 고려는 여진 정벌 등의 여파로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북방에서 흥기한 몽골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대체로 평화를 구가하였다.
[몽골의 침입]
몽골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8년(고종 45)까지 대략 30년간에 걸쳐 여섯 차례나 고려에 침입하였다. 몽골군이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일대까지 침입해 온 것은 제6차 공격 때이다.
몽골군은 1255년(고종 42) 차라대(車羅大)를 주장(主將)으로 삼아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 지역을 유린한 뒤 전라도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에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광주·나주·담양 지역 등이 점령되어 많은 피해를 겪었다.
차라대는 나주에 둔소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광주의 무등산 정상으로 옮겨 다음해 강화도 방면으로 이동할 때까지 머물렀다. 몽골군이 무등산 정상에 주둔한 것은 고려군의 기습을 대비하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등산을 거점으로 삼고 화순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떨어진 여러 군현에 대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몽골 침입 시 고려의 집정자였던 최우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면서 각 도에 명령을 내려 현지 지방관들이 관할 백성들을 이끌고 해도(海島)와 산성(山城)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하였다. 산성에 들어간 사람들은 머루나 다래를 채집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조개를 채취하고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였다. 화순 지역 주민들 역시 인근의 산성 등에서 입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통은 1270년(원종 11)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하고 출륙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