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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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895년부터 1911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항일 항쟁.
[초기 의병 운동의 형태]
1895년(고종 32)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으로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고, 화순 지역에서도 이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화순 지역 인사들의 활동은 개인 자격으로 외지에서 일어난 거병에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1896년 능주 지역의 정의림이 나주 지역에서 온 기우만 의병 부대에 참여한 사실이나 1906년 문달환과 양재해가 전라북도 태인 지역의 최익현 부대에 참가한 경우가 이런 사례들이다. 대개 이런 참여는 학연이 큰 고리 역할을 했고 의병 활동도 단기간에 끝났다.
[의병 운동의 변화]
1907년 이후 화순 지역의 의병 운동은 크게 변모한다. 1907년 4월 양회일은 이양면에서 의병 부대[일명 쌍산 의소]를 결성했다. 의병 부대는 이양면의 계당산 아래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의병을 모집, 1907년 4월에 능주읍과 화순읍을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행정 구역상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지역에서 발족한 고광순 부대도 같은 해 9월 동복 읍내를 공격하였고, 1908년 4월에 이학삼 부대는 화순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이후에는 소소한 습격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다.
[의병 부대의 무장]
1907년 이후 화순 지역의 의병들은 상당수 총기를 휴대했다. 그러나 총기는 대부분 유효 사거리 70m 정도인 화승총 수준이었다. 1907년 4월 양회일이 체포될 당시 부대원들은 조총 18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밖에 다른 부대의 무장은 도검류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유효 사거리 460m의 38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전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1907년 4월 22일 양회일 부대가 능주읍에 침입하여 관아에서 서양총을 탈취한 것은 무장의 열세를 만회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의병들이 종종 관아나 일본군 순사 주재소를 습격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의병의 이동로]
의병들은 주로 화순 지역의 험준한 산세를 활용해 주로 산악으로 이동했다. 공격 목표를 타격하거나 후퇴할 때도 산악 지형을 이용했다. 1907년 9월 고광순 부대원 50여 명이 동복 읍내를 습격한 뒤에 내견산으로 퇴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더러 의병 중에는 도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1908년 3월 일단의 의병들은 대낮에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와 사평리를 잇는 길, 현재의 국도 15호선과 같은 축선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소수인 경우에 한했고 대부분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고개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왕왕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09년 4월 심남일 부대는 전라남도 장흥 지역과의 경계인 바람재[풍치]를 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이 한창이던 1909년 10월 같은 고개를 이용하려던 심남일과 부장인 강무경은 바람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의병의 공격 목표]
의병들은 1907~1908년 사이에 관아와 일본 순사주재소를 빈번히 습격하였다. 이러한 습격은 의병 활동을 널리 알리고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부수적으로는 의병 자원자를 확보하고 신식 무기와 군량 등을 조달하는 효과가 있었다. 1907년 양회일 부대의 화순 읍내 습격 때처럼 우편소와 전신주 파괴를 통해 일본군의 통신선을 차단하려는 노력도 했다. 또한 1909년 3월 전해산 부대가 퇴직 군수의 집에서 군자금을 받아간 것처럼 부호나 친일 분자 등을 통해 현금과 군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일제의 진압 작전]
화순 지역의 의병은 지형적인 이점을 잘 활용해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일본군조차 화순 지역의 지형과 의병의 관계를 일컬어 “산간벽촌으로 험준한 길이 많아 이동이 쉽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도로의 개수를 통해 “군대와 경찰의 토벌 행동에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지 일본군 측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1908년 10월 일본군 헌병대는 의병의 색출과 추적을 위해 일진회 회원으로 정찰대를 편성해 화순 지역에 투입하였다. 아울러 경부선 철도 연변의 의병 진압이 완료됐다고 판단한 일제는 정규군 2개 연대를 화순 지역 등 전라남도 지역에 투입해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시작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었고 이 작전의 여파로 화순 지역의 의병 부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