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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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철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 5월 15일 - 화순 청년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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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1월 - 화순 청년회 산하 조직 화순 구락부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6월 - 화순 청년회 조선 청년 총동맹에 가입 |
최초 설립지 | 화순 청년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
성격 | 청년 운동 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변천]
화순 청년회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출범했다. 기록상 화순군 화순면[현 화순군 화순읍] 최초의 청년 단체는 1920년 4월 화순 유지들의 찬조를 받아 화순 보통 학교 교사인 국진호와 정준호가 설립한 화순 청년 구락부였다. 화순 청년 구락부의 창립에는 60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활동상을 전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화순 청년회는 청년 구락부 창립 이후인 5월 15일에 결성되었다. 화순 청년회의 발족이 앞서 결성된 청년 구락부와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락부의 창립이 촉매제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근 능주·동복 지역의 청년회 결성 움직임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화순 청년회의 결성에는 주로 박재순·박현경 등 화순 읍내의 유력 인사들과 자제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초기 명칭은 화순 청년 수양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립 당시 단체 설립의 목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참여 인사들이 화순군 화순면 일원에 거주하는 지주나 유지, 혹은 자제들이었던 점, 그리고 화순 청년회의 일부 활동이 교육·폐습 근절·체육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화순 청년회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10월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 운영으로 시작되었다. 교육 사업은 이듬해 6월 강습회로 이어졌고 야학 운영은 기록상 1925년까지 이어진다.
또한 청년회는 1921년에 아편 근절 운동도 전개했다. 아편 근절 운동은 당시 군청이나 경찰에서도 관심을 가진 사업이었다. 한편으로 청년회는 1923년 8월 전남 정구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창립 초기에 화순 청년회는 화순 유지들의 찬조를 받았으나 점차 그 지원은 줄어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2년 6월 강습회를 시작하고 운영비 마련을 위해 유료 연극 공연을 개최했고, 1923년에는 청년 회관 수리비 조달을 위해 소인극을 열었으며, 1925년 11월에는 음악회를 열어 야학 운영비를 충당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청년회 운영에 계속 어려움을 겪은 듯이 보이는데, 1925년 6월에 단체 규정을 변경하여 회원 자격을 확대한 것도 회비 수입의 증대를 위한 노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순 청년회 운영난은 지역 내 의견 차이와 내부 알력 관계를 암시한다. 1926년 7월 주재학과 조병철이 ‘혁신 총회’를 주도하여 이전까지 화순 청년회가 ‘주의 강령도 없이’ 운영되어 온 것을 비판하면서 향후 ‘해방 운동의 전위’가 되고 ‘계급 투쟁을 목표’로 활동할 것을 천명하는 등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화순 청년회는 지역 내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높이는 쪽으로 선회했다. 같은 해 10월 화순의 대표적인 부호이자 전임 회장인 박현경이 손자의 병을 치료하려고 자신이 운영하는 과수원의 인부에게서 척수를 추출했던 일에 대해 성토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은 1922년 화순 청년회가 박현경의 과수원 사업을 모범적이라 치켜세우며 선전했던 것과 큰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아울러 청년회는 1926년 6월 조선 청년 총동맹에 가입하고 7월에는 전남 청년 연맹·해방자 동맹 소속 연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이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1928년 1월 화순군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청년단체를 규합, 통일된 단체인 화순 청년 동맹을 결성하고 3월에는 산하에 화순 지부를 조직하였다. 화순 청년회는 이때 화순 지부에 흡수된 듯하다. 아울러 1928년 8월에는 그동안 화순 청년회를 주도한 주재학도 고려 공산 청년회 사건으로 체포된다.
[의의와 평가]
화순 청년회는 1920년대 화순 지역 청년 및 사회 운동의 변화를 보여 준다. 초기의 농촌 빈민이나 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시혜적이고 계몽적인 교육 활동에서 점차 사회주의적 사상 단체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또한 화순 청년회의 활동가들이 화순 노동조합의 결성 등을 주도했던 것을 보면 화순 청년회는 이후 화순 지역의 농민과 노동운동의 촉매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