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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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鐵甕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안성리|백아면 다곡리|이서면 장학리|이서면 보산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최인선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6년 6월 - 화순철옹산성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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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5월 - 화순철옹산성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완료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4월 6일 - 화순철옹산성 조선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12월 30일 - 화순철옹산성 조선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완료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12월 13일 - 화순철옹산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195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화순철옹산성 전라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화순철옹산성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백아면|이서면 |
성격 | 성(城)|산성 |
양식 | 포곡식 |
관련 인물 | 황진(黃進)|오계연(吳啓鍊) |
크기(높이,길이,둘레) | 4m[높이]|500m[길이] |
소유자 | 화순군청 |
관리자 | 화순군청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안성리 신성 마을 뒷산 옹성산 일대에 있는 산성.
[개설]
산성은 산세를 따라서 산에 쌓은 성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잘 발달되어 현재 중부 이남에만 1,200여 개의 산성 터가 남아 있다. 산성은 평상시에 군창(軍倉)을 두고 여기에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며, 적이 침입하면 평지의 주민들을 모두 들어오게 하여 농성하는 곳이다. 위치한 지형에 따라 테뫼식이나 포곡식으로 구분한다.
[위치]
철옹산성은 높이 572.9m의 옹성산 일대에 있는데 이는 화순군 이서면, 동복면, 백아면의 경계 지점이다. 북으로는 화순군 백아면 다곡리 하터 마을과 접하고, 남으로는 동복면 안성리 신성 마을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동복호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안성리 안림 마을과 접하고 있다.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복현 산천조에는 “옹성산은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산에 세 바위가 있어 모양이 독과 같이 우뚝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적조에는 “옹성 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874척[약 1,173m]이고, 성 위에 석대(石臺)가 100여 척[약 30m]이 있다. 그 위에 또 돌 기둥과 돌 문지방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한전의 옛 터이다”라고 하여 옹성산성의 규모와 절터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여지도서』[1760]의 내용도 이와 거의 동일하다.
『대동지지』[1864] 동복현 성지조를 보면 옹성 산성의 형세가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 북쪽으로 10리[약 4㎞]에 있고, 둘레는 3,874척이며 돌길은 겨우 사람의 발길이 통할만하다. 길이 언덕 아래로 나왔는데 사람이 성산에 올라서 굽어보면 성 밖으로 10여 보이다. 뾰족한 봉우리가 서로 대하여 그 사이에 사이 길이 있는데 사람은 올라설 수가 없다.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고, 동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로 된 절벽이어서 1만 길을 깎아 섰는데, 그 가운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시내가 있고 남쪽으로는 두 개의 문이 있어서 도적을 잡아 오는 것을 받는 곳이다. 황진(黃進)이 현감 때에 동복면 한 모퉁이를 끊고 거기에 성을 쌓아서 내성을 삼았다”라고 하여, 황진이 현감으로 재직할 때 내성을 수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필사된 『좌해경방』이라는 자료를 보면 철옹산성의 형세와 수비 범위에 관해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철옹산성은 현의 북쪽 15리[약 6㎞]에 있다. 바위 형태가 옹과 같아서 옹성이라고 하였다. 석축 둘레가 7리[약 2.7㎞] 가량 되고, 성의 동문과 북문 두 문만이 오직 적을 맞을 수 있는 곳이다. 남쪽에서 서쪽을 거쳐 북쪽까지와 북쪽에서 동쪽까지는 모두 절벽이어서 1만 길을 깎아 세운 것 같아 참으로 천연 요새이다. 우물이 7개 있는데 크게 풍족하지는 않으나, 서쪽 봉우리에서 아래로 스며들어 동벽을 통해 새끼줄처럼 흘러 큰 계곡에 이른다. 절벽이 하늘에 매달려 적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다. 구지가 많아 퇴폐하여 황진이 현감 시 동복면 한 모퉁이를 횡절하여 내성을 쌓았다. 화순과 능성이 모두 들어간다”고 하여 동복·화순·능성 세 고을은 위기 시 각기 지니고 있는 수호성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국가 위란 시 세 고을 백성이 모두 철옹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도록 편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립 경위]
현재 철옹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나 배경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동복 지역 사람들이 변란 때 숨어서 살성으로 축조하였다고 전해지고, 고려 말기에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고 전하기도 하고, 정유재란[1597] 때 주민 피난소로 쌓았다고도 한다. 동복 현감을 지낸 황진(黃進) 장군이 정유재란을 당하여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하며, 동학 농민 전쟁 때 동복 현감 오계연(吳啓鍊)이 재축조 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나 이 역시 확증하기는 어렵다.
[형태와 현황]
철옹산성은 조선 시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래 성의 길이가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하나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약 500m 정도이고, 성벽의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4m 정도이다.
동벽은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고 있다. 동벽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동북쪽 건물지 앞부분과 동문이 있는 곳이고, 나머지 부분은 두 개의 암봉을 이용하여 암봉 자체가 천연의 성벽이 되도록 하였다.
남벽은 산능선과 절벽을 이용하고 있다. 남문지 부근은 산 경사면을 깎아낸 후 양쪽에 성벽을 축조한 협축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가공한 돌을 이용하여 9~10단으로 쌓고 있는데 거의 수직으로 축조하고 있다. 현재 높이 1.6~2m, 폭 1.8m가 남아 있다.
서벽은 옹성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매우 가파른 자연 지형을 이용하고 있다. 이곳은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어 특별한 성벽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벽은 예성산 정상부의 평탄한 면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사면을 가파르게 깎아내고 10~15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는데 그 높이는 약 3m에 폭은 좁은 편이다. 옹성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편축으로 이어지다가 잘록한 허리가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는 다시 동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북벽 중간의 허리 부분에서는 사방이 잘 내려다보이는 망루가 남아 있다.
동북쪽 암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계곡을 차단하는 성벽이 있다. 동북쪽 암봉 사이의 계곡을 막은 일차적인 방어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등산로가 나면서 훼손되었으나, 약 15m 정도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문지는 동문지와 남문지가 있는데, 동문지는 파괴가 심하여 확인하기가 어렵고, 남문지는 남벽과 동남쪽 암봉 사이에 있는데 높이 340m 지점에 있다. 남문지 부근의 성벽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일부는 잘 보존되어 있어 현재 높이 1.6~2m, 폭1.8m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지의 크기는 길이가 5.8m, 폭1.8m, 높이1.6m이다.
성내에는 내부의 평탄한 지역을 이용하여 다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도 우물이 잘 남아 있고 그 주변에서는 상당량의 토기 편과 기와편이 나오고 있다. 특히 문바위 부근의 건물지는 길이 40m, 폭 20m의 삼각형이고 그 내부에 3~5m 규모의 구들이 남아 있다. 이곳은 암자터로 여겨지는데 훗날에 지은 건물 지가 아닌가 한다.
건물지 주변에서 채집되는 유물을 보면, 북동쪽 건물지 주변에서 회청색 경질 암기와편이 다량 출토되는데 표면에는 복합문이 새겨진 것과 삼각문이 새겨진 것이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회청색 경질 토기 저부 편과 백자 저부 편이 약간씩 보이기도 한다. 남문지 건물 주변에서는 흑색 경질 수키와 편과 회청색 경질 암기와 편이 출토되는데, 흑색 경질 수키와 편은 무문이고, 회청색 경질 암기와편은 표면에 복합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문바위 주변에서는 흑청색 경질 수키와 편과 회청색 경질 암기와 편, 회백색 경질 암기와 편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은 표면에 집선문이 새겨진 것도 있고 격자문이 새겨진 것도 있으나, 뚜렷하지는 않다.
[성격]
철옹산성은 높이 572.9m의 옹성산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 연장 길이는 약 5㎞이다. 성벽은 높이 275~550m 일대에 분포하고, 축조 방식은 부분적으로 약간 다르다.
철옹산성의 축조 재료는 거의 대부분 석재와 암벽을 이용한 것이다. 성돌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석을 가공하여 이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벽은 기단석을 큰돌로 사용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큰 성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어 큰 성돌들이 움직이지 않게 하여 안정감 있게 축조하였다. 성벽은 협축법과 편축법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철옹산성은 목적에 따라서는 군사적인 피난성, 지형에 따라서는 산성,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는 내륙성, 축조 재료에 따라서는 석성, 평면 형상에 따라서는 폐합부정형성, 중복도에 따라서는 복곽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2001년 12월 1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철옹산성은 동복면과 백아면을 경계하는 지리적 요충지인 독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형에 있는 산성이다. 또한 내부에 계곡을 포함하여 수량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의 노출도 방지해 줄 수 있는 구조여서 유사시 상당수의 군사와 주민들이 농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축조 시기와 배경에 관련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 꾸준히 등장하고, 수습된 유물이 대부분 조선 시대의 것이어서 고려~조선 말기까지 사용한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는 둘레가 약 5,000m에 달하는 대규모 산성이었으나, 현재 대부분 유실되고 약 500m 밖에 남아 있지 않아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