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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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浦의 德成倉과 鎭浦大捷 |
영어공식명칭 | Ungpoui Deokseongchang Jinpodaecheo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일대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양은용 |
[정의]
1380년 8월 전라북도 웅포에서 덕성창의 미곡을 탈취하려는 왜군과 고려군이 벌인 해상 전투.
[개설]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지고 금강과 만경강으로 둘러싸인 익산에는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시기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사람이 많고 곡식이 많으니 자연히 익산을 거쳐 가는 배와 말과 수레도 많았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이들도 찾았들었다. 바로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노리고 금강을 따라 쳐들어온 왜구들이다.
고려 말기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500선단을 이끌고 금강 하구를 통해 고려를 침략하였다. 왜구가 웅포[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에 위치한 덕성창의 미곡을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최무선을 부원수로, 심덕부를 도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이를 ‘진포대첩’이라 부른다. 특히 진포대첩에서 최무선의 화포로 500여 척의 선단을 이룬 왜구 전선을 폭파시키자 왜구는 한산과 옥구 등지로 흩어지고 주력부대는 관찰사가 위치한 전주를 피하여 남하하였다. 1380년 9월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 장군의 군대가 왜구들을 맞이하여,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활로 쏘아 죽이고 왜구들을 섬멸하여 황산대첩의 대승을 거둔다.
[웅포의 덕성창]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는 고창리(古倉里)가 있다. ‘옛 창고’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창리는 옛날 조운창이 있던 곳이다. 조선 초기 세종 때에는 ‘득성창(得成倉)’을 ‘덕성창(德成倉)’으로 개명하여 불렀다. 조선 초기의 조운창은 크게 3곳이 운영되었다. 먼저 웅포의 덕성창은 19곳의 조세를 모았던 곳이다. 나주의 영산창은 17곳이었고, 영광의 법성창은 15곳의 조세창을 거느렸다. 덕성창 산하의 조세창 19곳은 전주·임실·남원·임피·김제·장수·금구·운봉·익산·만경·여산·금산·진산·태인·옥구·진안·고산·무주·함열을 포함한다. 이들 조운창에는 각 지역에서 받은 조세 미곡이 항상 쌓여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조운창의 조세미곡을 강과 바다를 통하여 도읍인 개성으로, 조선 시대에는 한양으로 운반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덕성창에는 조세 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63척이나 있었다. 하지만 덕성창의 중요도와는 달리 겨우 병사 몇 사람이 덕성창을 지키고 있었고, 수호부대 또한 따로 없었다. 이는 중앙의 병권이 덕성창에 충분히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런 이유로 웅포의 덕성창은 늘 왜구의 표적이 되었다. 문민정치는 익산 지역 덕성창의 미곡이 도난당하더라도 고려나 조선의 왕실 조정은 다치지 않으니, 무신 집권처럼 큰 부대를 두어 도성에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낫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있었다.
[진포대첩과 왜구, 그리고 황산대첩]
고려 말기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무려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웅포 덕성창을 침범하였다. 왜구는 선단을 서로 묶어 덕성창의 조세 미곡을 탈취하여 배에 실었다. 길가에 흩어진 쌀이 한 자가 되었으니 왜구의 노략질은 천방지축 마음대로였다. 이때 웅연(熊淵), 즉 웅포 앞 깊은 못에 고려의 진압군이 들이닥쳤다. 당시 왜구는 남해안에 위치한 섬들의 위치와 조수간만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왜선은 주로 삼나무로 만들어져서 가볍고 빨랐다. 비유하자면 한 물살에도 금강 하구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왜구에게 미곡의 생산지로 이름난 호남 지역의 각 조세 창고의 미곡을 모두 모아 둔 웅포 덕성창은 늘 탐하고 싶은 먹잇감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을 지키는 군대도 별로 없어서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왜구에게는 그야말로 덕성창 침략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처럼 왜구가 무기로 무장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의 내부 사정도 한몫을 했다. 1192년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후 무신 정권이 들어서서 각 지방이 모두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왜구는 각 지역의 산물을 서로 무역하면서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무력으로 싸워서 지면 토벌과 함께 병합의 과정을 거쳤음으로 왜구들까지도 무장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고려 말에 일어난 왜구의 침범은 우리나라 조정의 혼란과 맞물려 중앙 조정의 약화와 함께 발생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380년 왜구의 웅포 덕성창 침입이 일어났을 때 급보를 전달받은 고려 조정에서는 바로 진압군을 편성하여 웅포에 내려보낸다. 이때의 상황은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실린 나세(羅世)전, 심덕부(沈德符)전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세 장군을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 장군을 부원수로, 심덕부 장군을 도원수로 삼았다. 이들이 해로를 통하여 금강 하구에 당도하였을 때에 왜구는 500여 척의 왜선을 서로 묶어 운동장처럼 만들어 덕성창의 미곡을 옮겨 싣고 있었다. 왜구는 진포구에 들어가 배를 매고 병사를 나누어 선단을 지키면서, 해안에 올라와서는 마을을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 마을의 산과 들은 고려 백성의 시체로 뒤덮였다. 또한, 곡식을 왜선에 운반할 때에 땅에 흘린 쌀의 두께가 한 자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 당시 고려의 진압군은 100척으로 왜적을 추포하여 웅포 앞의 진포에서 쳐서 이기고, 포로로 잡혀 있던 334인의 고려인을 구출하였다. 이때 김사혁은 남은 왜적을 임천에서 추포하여 46급을 참하기도 하였다. 전세가 다급해지자 왜구 50척은 웅연에 와서 머물다가 적현(狄峴)을 넘어 부녕현에 침구하여 동진교를 무너뜨렸다. 이때 고려의 군사가 섣불리 나아가지 못하자 나세 장군은 변안열과 조사민을 데리고 밤에 다리를 놓아 군사를 나누어 왜구를 쳤다. 이에 놀란 왜구의 보병 기갑 1,000여 명은 그대로 행안산에 올랐다. 행안산은 웅포와 용안 사이의 함라산을 말한다. 이때 고려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하니 왜구는 당황하여 크게 격파당하였다.
특히 나세 장군 등은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제조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배를 불태움으로써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게 된다. 삼나무로 만든 왜적선은 속수무책으로 불이 붙어 웅포 앞바다는 그야말로 연기와 불꽃으로 뒤덮였다. 왜선에서 배를 지키는 자들은 거의 다 타서 죽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나세 장군 등은 진무를 보내어 우왕에게 전리품을 바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진무에게 은 50량을 하사하였다. 또한 백관이 하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세 장군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우왕은 크게 잡희를 베풀어 맞이하였으며, 나세 장군에게도 금 50냥을, 비장인 정룡·윤송·최칠석 등에게도 은을 각각 50냥씩 하사하였다. 고려의 진압군이 왜구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둔 이 전투를 ‘진포대첩’이라 부른다. 웅포의 많은 백성들이 왜구들에게 귀한 목숨을 잃었지만, 웅포 앞의 전투는 우리 역사에 ‘진포대첩’이라는 의미 깊은 이름을 남겼다. 또한 승전고를 울리는 가장 큰 계기를 마련한 최무선의 화포는 우리 과학사와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크게 장식한 유명한 일화로 남게 되었다.
[달아난 왜구들, 그리고 황산대첩]
이러한 진포대첩의 일화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일화와도 연계된다. 진포대첩으로 와해된 왜구의 숫자는 정확히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왜적선이 500척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수천 명에서 만여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포로 선단을 폭파하고 진압군이 들이닥쳐 사살하여 많은 병사가 죽었고, 패잔 왜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현재는 전라북도 군산과 서천군의 한산이 자기 고장을 각각 진포로 추정하여 대첩기념물을 세우고 있다. 그만큼 진포대첩의 크기가 가변적이며 그 영역 또한 컸음을 의미한다. 진포대첩의 영향은 임천에서 왜구의 목을 친 일 등이 이를 대변하여 준다.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진포대첩의 전투는 웅포 앞의 넓은 금강 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패잔 왜구의 주력부대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라산을 넘어 남원 쪽으로 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일부는 금강 하구를 따라 군산과 부안 혹은 김제 쪽으로, 또 다른 일부는 강 건너 서천 혹은 부여 쪽으로 도망쳤음을 의미한다.
결국 패잔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전선을 잃고 해로가 차단당하자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남원 백두대간을 넘어 운봉에서 이성계 장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밤이 되자 왜구가 벌판에 벌떼처럼 내려왔다. 이에 이성계는 밝은 달을 매달아 놓고 활을 쏘아 적장 아지발도를 죽였다. 그리하여 웅포의 덕성창에 침입하였던 왜구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황산의 격전지는 오늘날 ‘인월(引月)’이라는 마을 이름을 얻게 되었다. 결국 웅포 덕성창에 침입하였던 왜구들은 남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 장군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1380년 9월의 일이다.
[덕성창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현재 진포대첩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둘이다. 한 명은 웅포의 전 시의원 이갑세(李甲世)[94세]이고, 다른 한 명은 전 익산문화원 원장 김복현(金福鉉)[75세]이다. 두 선생의 안내를 받아 옛날 덕성창이 있던 고창리에서부터 웅연, 곧 진포로 추정되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여 본다. 웅포는 옛말로 ‘곰개’이며, 나포는 ‘비단개’, 목천포는 ‘나뭇개’, 춘포는 ‘봄개’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둘은 금강길을 내면서 곰바위를 털어내 버렸다고 한목소리를 높인다. 고창리 앞의 강가에 이르면 연못과도 같은 넓은 곳이 있는데, 명주실에 돌을 묶어 이곳에 넣으면 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이 깊었던 것이다. 만약 최첨단의 장비로 이곳을 발굴 조사한다면 진포대첩 당시의 왜적선의 잔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웅포의 야영장에는 새로 지은 덕양정(德養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원래는 웅포면사무소 근처에 있었는데, 이는 덕성창을 지키기 위하여 무인들이 활을 쏘던 곳이었다고 하니, 진포대첩과도 큰 인연이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가까운 동산에 오르면 커다란 팽나무들 사이에 용왕사(龍王祠)가 있다. 용왕사는 진포대첩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여 왔는데, 일제 강점기에 철폐된 후 아직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고창리에는 기념관이 들어서야 하고, 용왕사 등은 진포대첩과 관련하여 복원하여야 한다.
진포대첩 이후의 덕성창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실록(世宗實錄)』은 이에 관한 사항을 자세하게 전한다. 세종 대에 이르러 마을 이름에서 연유하여 쓰던 득성창이 ‘덕성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고려 시대에는 이곳이 득성창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창고의 위치를 옮기게 되는데, 덕성창은 함열현 서쪽 피포에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 조세창은 함열·전주·남원·익산·고부·김제·금산·진산·순창·임피·옥구·만경·부안·정읍·금구·태인·임실·구례·운봉·장수·진안·용담·무주·고산·여산·용안 등의 조세를 모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이때의 덕성창 수호군은 3명으로, 아마도 고려 시대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덕성창은 장소를 바꿔 가며 운용된다. 이는 모두 마을의 쇠퇴나 부두의 운용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덕성창의 역사를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웅포의 자랑이자, 익산의 빛나는 전통문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