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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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浦- |
영어공식명칭 | Wungfo Gomgaenaru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수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와 충청남도 한산면 신성리를 잇는 나루터.
[개설]
웅포 곰개나루는 익산시 웅포면에 위치한 나루터이다. 웅포면 일대는 조선 후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통해 크게 번성한 지역이며, 전국 5대 시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곰개나루는 수운 기능을 기반으로 성장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철도의 개설과 수운 기능의 약화로 점차 쇠퇴하다가 현대에 이르러 폐항하였다. 현재는 곰개나루와 웅포관광지가 익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떠올랐으며, 자전거 트래킹과 캠핑 등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특히 덕양정(德讓亭)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국내에서 강 위로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낙조로 유명해 서해 5대 낙조 관람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명칭 유래]
곰개나루의 명칭은 포구의 지형이 곰이 금강의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熊浦]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금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는데, 웅포 부근의 금강 유역은 ‘웅포강’이라고도 칭했다. 곰개나루는 서해 해산물의 집결지이기도 했으며, 금강의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농업과 어업이 함께 이루어졌다.
[형성 및 변천]
웅포는 조선 초기에 일시적으로 조창이 운영된 지역이다. 조창은 각 지방에서 내륙수로나 바닷길을 통해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한 조곡과 공물 등을 수납, 보관, 수송하기 위한 거점이다. 웅포는 조선 후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1970년대까지도 많은 객주들이 활동하여 번창했고, 하류의 군산항과 상류의 강경포의 중개지점으로서 성장하여 전국 5대 시장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웅포의 수운 기능은 철도의 개설과 함께 군산으로 흡수되기 시작했으며, 미곡 외의 상품 수송은 철도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1912년에는 여객수송 기능이 약화되어 일부 폐항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초에는 군산-강경 간 지름길로서 철도 우회역할을 해오던 기능 또한 사라졌다. 특히 1972년 유류파동이 있었을 당시 기름의 면세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군산항에 비해 배가 정박하기에 불리한 조건이 이어지자 결국 폐항에 이르렀다.
현재는 상실된 나루터의 기능 대신 관광지로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자전거길과 캠핑장이 많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웅포의 자전거길은 금강권역 자전거길에 속해있으며, 성당까지 19km, 망성까지 10km가 이어지는 총 29km 구간에 이른다. 곰개나루는 관광객들의 체험프로그램으로 황포돛배를 운영하고 있어, 유람선을 타고 신성리 갈대밭과 부여 시음리 꽃단지를 둘러볼 수 있다. 웅포관광지(곰개나루)캠핑장의 경우 일반캠핑장이 58면, 오토캠핑장이 6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캠핑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곰개나루는 바다가 아닌 강 위로 지는 일몰을 볼 수 있는 전국 몇 안되는 명소이며, 서해 5대 낙조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덕양정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풍경이 유명한데, 덕양정은 과거에 용왕제를 지내던 용왕사(龍王寺)가 있던 자리로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용왕사는 약 400여 년전에 건축되었으나, 1945년 태풍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1982년 익산군에서 시멘트 구조로 된 2층 건물을 지어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였는데, 2005년에 현재의 목조건축물로 재건되었다. 곰개나루의 용왕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진포대첩 당시 왜구와 싸우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조운선의 안전과 풍어 및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였다. 덕양정 한 켠에는 진포대첩의 내역이 적힌 기념탑이 있다.
익산시는 매년 12월 31일, 서해 5대 낙조 중 하나인 웅포 곰개나루를 활용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뜻 깊게 맞이하기 위한 웅포곰개나루해넘이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웅포 곰개나루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강변로 25에 위치하고 있다. 나루터의 기능은 없어졌지만 관광객들의 체험프로그램으로 황포돛배를 운영하고 있어, 유람선을 타고 신성리 갈대밭과 부여 시음리 꽃단지를 둘러볼 수 있다.
[관련 기록]
19세기 중엽 김정호(金正浩)[1804~1866 추정]가 그린 『청구도(靑邱圖)』에 따르면 웅포는 강경포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여 강경포의 유통독점을 방해하였다. 1899년 군산이 개항한 후에는 중개를 넘어 배후 곡창지대의 미곡을 직접 유통하는 역할을 했으며 강경, 군산 간 항로가 개설되었을 때 입포, 성당과 더불어 중간 기항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84년 2월에 제작된 『함열현읍지(咸悅縣邑誌)』에 따르면 당시의 지토선은 51척에 세전이 65냥 5전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당시 웅포 곰개나루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