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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념 시위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09
한자 三-一節紀念示威事件
영어음역 Samiljeol Ginyeom Siwi Sageon
영어의미역 March First Pro-Independence Rally Incident
이칭/별칭 3·1절 발포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위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7년 3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8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관덕정으로 가는 도로
관련인물/단체 제주도 인민위원회|남로당

[정의]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오인 발포하여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해방 후 제주도에서는 주민 자치 조직인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어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한국에 대한 모든 통치권은 미군에 의해 귀속되었다. 미군정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고자 남한 내 모든 사회 단체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미군정의 탄압에 제주도 인민 위원회와 도민들은 자주 독립 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각종 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제주 지역은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창궐로 인한 수백 명의 사망자 발생, 극심한 흉년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으며, 미곡 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 행위 등이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목적]

제주도민들은 평화적인 집회를 열어 자주적인 독립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발단]

1947년 3월 1일 제주 북 국민학교에서는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 개최로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념식이 끝나자 식에 참가했던 제주도민들은 3·1정신 계승과 외세 배격, 통일 독립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제주 북 국민학교에서 관덕정으로 가는 도로 모퉁이에서 어린이가 기마대의 말발굽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경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군중심리가 더욱 자극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라고 외치며 대치 중이던 경찰의 바리케이드로 향했다. 그때 제주도청(옛 제주 경찰서) 쪽에서 총소리가 나면서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고 이에 당황한 경찰들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경찰의 오인 총격으로 시위대와 무관한 구경꾼들을 포함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절 기념 시위 사건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남노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 활동을 전개했으며, 제주도민 전체 직장인의 95% 이상이 대규모 민·관 총파업에 참여하였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미군정에서 제주 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한 결과,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노당의 선동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결과]

경찰의 오인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 6명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15세, 제주 북 국민학교 5년, 남], 박재옥(朴才玉)[21세, 여], 오문수(吳文壽)[34세, 남], 김태진(金泰珍)[38세, 남], 양무봉(梁戊鳳)[49세, 남], 송덕수(宋德洙)[49세, 남] 등으로 밝혀졌다.

미군정은 사후 처리 당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노당의 선동에 비중을 둔 강공 정책을 추진하였다.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은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되었고, 응원 경찰과 서북 청년단 단원 등을 대거 제주 지역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전개하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었고, 1년 동안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그러는 사이 서북 청년단은 제주 지역에서 온갖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하였으며,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급기야 일선 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제주 지역은 폭풍 전야의 위기 상황이 되었으며, 결국 제주 4·3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3·1절 기념 시위 사건은 경찰이 오인 발포로 시위 군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함에 따라 제주 4·3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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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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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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