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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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向化倭人分置 |
이칭/별칭 | 귀화왜인 분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채연 |
[정의]
조선 전기 투항 왜인을 진안현에 나누어 거주하게 한 일.
[개설]
조선 초기 왜구 대책의 실시와 식량의 부족 등 생활고로 인해 조선에 투항하는 왜인이 증가하였다. 조선에서는 향화왜인(向化倭人)이 흥리왜인(興利倭人)[조선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던 왜인]과 서로 왕래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향화왜인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지방에 나누어 거주시켰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진안 지역에도 만시라(萬時羅) 등 향화왜인이 분치되어 살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정부는 건국 직후부터 왜구에 대한 방비책 및 회유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왜구는 조선에 투항하거나 평화적인 통교자로 바뀌었고, 조선에서는 이들을 향화왜인이라 칭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들에게 토지·식량·가옥 등을 주어 조선에 살도록 하자 향화왜인이 계속해서 증가하여 1410년(태종 10)에는 경상도에 분치된 향화왜인이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향화왜인이 흥리왜인과 서로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나자 이들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지방으로 이주시켰고, 향화왜인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분산 거주시키는 한편 사적인 왕래와 통신을 금지하였다.
[경과]
1423년(세종 5) 2월에 대마도의 왜인인 변삼보라(邊三甫羅)와 만시라(萬時羅) 등이 경작지가 적고 생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처자 24명을 데리고 귀화를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전라도에 안치시키고 농사를 짓기 전까지 양식을 주도록 하였다. 이후 이들 중에서 만시라(萬時羅)·표아시라(表阿時羅)·삼미삼보라(三味三甫羅) 등을 진안현에 분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분치 시점이 너무 늦어 농사 시기를 놓쳤고 화재로 곡식을 잃었기 때문에 1424년 3월에 호조의 요청으로 이들을 구휼하였다.
[결과]
조선 정부는 ‘가는 자는 막지 않고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취하였으므로 향화왜인 중 조선에 그대로 거주하는 자도 있었지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자도 있었다. 진안현에 분치된 향화왜인의 이후 행적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표아시라(表阿時羅)는 1440년부터 1461년까지 대마도주의 사자로 조선에 왔었고, 만시라(萬時羅)는 1450년에 대마도주의 사자로 조선에 왔다가 충청도 청풍 지역에서 죽었다.
[의의와 평가]
향화왜인의 진안현에 분치는 조선 정부가 향화왜인을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파악할 때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