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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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東屹 |
이칭/별칭 | 사탁(士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무신.
[개설]
1624년(인조 2) 서울에 올라가 월사 이정구 문하에 들어갔으나 그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파천하니 그 때 나이 15세에 지원병이 되어 충성을 다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부친 전대승(全大昇)이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하면서 병서를 탐독하였다.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嘉齋). 고조할아버지는 전이충(全以忠)으로 영릉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증조할아버지는 전규로 예빈시 주부를 지냈고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는 전수감으로 사옹원 참봉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예조 판서에 가증되어 절의록에 기록되었다.
[활동 사항]
전동흘(全東屹)[?~?]은 1644년(인조 22) 심기원의 역모에 창의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 공이 있어 효종 대에 장사랑이 되었고,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용맹을 떨쳤으나 삼전도의 항복으로 동궁과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니 동궁의 배종무관이 되어 청나라까지 갔다. 전동흘은 이 기회에 청의 국방 태세 군사 배치 등을 낱낱이 조사하여 군사상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귀국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1650년(효종 1)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이 전동흘과 이상진, 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니 이들을 ‘호남삼걸’이라 하였다. 강원 병사, 충청 병사, 황해 병사, 경상 좌수사 등 4수사(水使) 7병사를 역임하였고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청나라 몰래 창덕궁 옆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청국 사신이 이를 문제 삼아 조정에 압력을 가하자 전동흘에게 훈련 대장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내려 해결토록 하니 전동흘이 해결하였다. 또한 철산 부사로 있을 때 장화 홍련의 원혼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묘소]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