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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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大昇 |
이칭/별칭 | 휘원(輝遠),이산(駬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개설]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世居)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승이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은천 마을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은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휘원(輝遠), 호는 이산(駬山). 문평공(文平公) 도은(都隱)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전규(全奎)이고 아버지는 증 좌승지(贈左承旨) 전수함(全守艦)이다. 아들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전동흘(全東屹)이다.
[활동 사항]
전대승(全大昇)[?~?]은 『대한 이산묘지』에 의하면 풍채가 준수하였고 뜻이 매우 높았다. 또한 젊어서부터 글공부를 하는 틈틈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 경전 강독과 해석에도 힘쓰니, 사람들이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여기고 장차 크게 쓰일 인재로 여겼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전대승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남해 노량진(露梁津)에서 왜적을 크게 부수고 전사하였는데, 전대승은 항상 이 같은 사실을 뼈에 새기듯 외적(外敵)에 대한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조 때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거느리고 평양에서 적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전투 중 화살이 모두 떨어지는 등 위기에 처했음에도 죽기를 맹세하고 싸움을 독려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병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숙종 때 예조 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