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3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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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아 |
구산동마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산동마을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농다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천 년의 세월을 버텨 지금까지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농다리와 함께 상산임씨 1,100년 세거지인 구산동마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역사의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구산동마을 토박이로 상산임씨 문중의 이모저모를 살펴오며 살아온 임필수 할아버지께서 상산임씨 1,100년 세거지를 만들고 지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적으로 몰렸던 임연 장군 사적비를 세우기까지]
구산동마을에는 임연 장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만큼 임씨 세거지에서는 임연 장군이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농다리전시관 앞쪽에 세워진 임씨 조상들의 선조비 이야기를 듣던 중 임연 장군 일가가 한때 역적으로 몰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게, 81년 전에 세웠을껴. 1981년. 서울 화수회, 종친회에서 해 줬어. 그 양반 비를 임연 장군, 그 유명한 양반 아니여, 그 양반이 비석 못한 게 뭐냐면 그 아들이 몽고에 가서 항복을 해 가지고 비석을 못했어. 그래서 그 양반이 빛을 못 봤지. 이 덕문이 방죽이 그 양반 집터였어. 임연 장군의 집터. 그 우리가 거기 그 일정 때 해방되고서 연꽃도 심고 그랬는데 거기 돌라면 한 시간 걸렸어. 4만 평[132,231.405㎡] 되니까. 임연 장군 집터였었는데, 역적은 왜 뺏기잖여. 260평[859.50㎡]을 안 주고 거기다 임연 장군 사적비를 심었어.”
구산동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에 덕문이 방죽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임연 장군 집터라고 한다. 임연 장군 일가가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솔들이 모두 마을에서 쫓겨난 뒤 집터는 방죽으로 만들어 버렸으나, 마을이 커지면서 방죽을 메워 현재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역적으로 오인 받고 그 일가가 모두 집터를 떠나야 했던 만큼 임연 장군의 비를 세우는 게 힘들었지만, 1,100년 세월을 이어온 임씨 세거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1981년 임연 장군 사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상들이 남긴 교지로 연을 만들어 날려 버린 손자]
임필수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소문난 개구쟁이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늘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장난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서 뒤주에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뒤주를 열어 보았는데, 연을 만들기에 딱 좋은 크기의 종이가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스물여덟 살에 혼자 돼 가지구 여든여섯 살에 돌아가셨어. 여기서 얘 너 이리 와봐. 두주가 있는데 거기에 중요한 물건이 있다. 그거 아무도 주지 말구 잘 보관을 해라. 그래서 뒤줘 보니께 뭘 알아야지. 국민핵교 땐데, 뭘 알 수가 있어. 근데 그땐 왜 종이두 없었자너. 내가 연을 하나 맨들었어. 하나 없어졌어 그래서. 연을 맨드니께 마침하데. 그렇게 하나 없어지구.”
평소에 못 보던 빳빳한 종이가 반가웠던 할아버지는 지체 없이 연을 만들어 날리다가 연줄을 끊어서 연을 날려 버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임씨 가문 조상들의 벼슬 내력이 담긴 교지였던 것이다.
5대조부터 구산동마을에서 살아왔다는 임필수 할아버지는 현재 집안에서 전해 오는 교지 7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가중 13년 정월, 이렇게 다 6대조 할아버지여, 6대조. 또 여기두 고조할아버지구. 경자 학자, 광서 19년 9월, 이거는 저 이 양반 안식구. 이 양반 안식구, 그때 교지를 받게 되면은 다 가졌어, 부인까지. 그래서 이 연씨 숙부인. 그래 6대조 할아버지 가증대부, 정월 6대조 할아버지여. 여기는 6대조 할아버지 절충장군이면 국방장관이여, 시방. 그래 절충장군이 시방 국방장관, 시방으로 말하면. 우리 집안이 벼슬 제일 많이 했어. 내가 볼 땐.”
교지를 받았던 당시의 상황과 인물, 벼슬 이름까지 기억하고 연구하며, 할아버지는 집안의 선조들이 벼슬도 많이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족보 또한 절충장군을 거친 고조할아버지가 직접 쓴 족보도 보관하고 있었다. 족보는 한눈에 보아도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필체로 손수 써서 엮은 것으로, 매우 정갈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붓글씨는 세월이 더해 갈수록 색이 선명해지고 생생해진다고 하는데, 정말 세월이 무색할 만큼 뚜렷한 선명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회장을 맡아 본 화수회]
우리는 구산동마을에서 1,100년 상산임씨 세거지에 의의를 두고 상산임씨의 얼을 이어가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 알아보았다. 임필수 할아버지는 상산임씨로서 집안의 일뿐만 아니라 임씨 가문의 얼을 이어가기 위해 일생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화수회’라는 이름으로 상산임씨 진천[상산], 고양, 안성, 인수 4대 파가 모여 화수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임필수 할아버지는 1981년부터 20년 동안 화수회 회장을 맡아 하며 1,100년 세거지를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상산임씨 화수회라구 진천, 고양, 안성, 인수 4대파가 있어 그걸 합해서 화수회라고 명칭을 했지, 우리가 명칭을 했지. 한 20년 봤는데, 사당두 내가 설립했지. 그거 말구 부자 충신, 부자 충신은 일정 때 우리 아버지하구 저 일정 때 부자 충신이라고 나와 있지. 왜, 저기는 장렬사라고 있어. 장렬사 그거 내가 지었지, 내가 모금해서 진겨.”
마을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장렬사는 이렇게 화수회의 노력으로 지어진 것이다. 사당을 짓기 위해 화수회 사람들뿐만 아니라 임씨 세거지를 지키기 위한 많은 사람이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사당이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모두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100여 명이 모금에 참여하였다. 당시는 쌀 한 말에 28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상산임씨 세거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로 모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1년에 한 번 장렬사에서는 제의를 올린다. 매년 9월 초정일이 되면 장렬사 앞에 임씨 종가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며 1,100년 세거지의 얼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