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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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 초까지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충청북도 진천은 구한말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으로, 반제국주의 항일 의식이 국치 이후에도 잠재하고 있었다. 일제의 한국 강점과 무단 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진천 출신 조명희[중앙고보]와 홍순복[경성고보]은 서울에서, 박승하[청주농업학교]는 청주에서 각기 재학 중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일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1919년 3월 14일 저녁 문명학교[현 상산초등학교]를 세워 배일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해 오던 이상설의 종형제 이상직(李相稷) 등이 비밀리에 자택 객실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협의하여 장날인 3월 15일 정오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일제 헌병보조원의 밀고로 진천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이상직 등이 검거되었으므로 정오에 거사하기로 한 독립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교[감리교·성공회]의 전도 부인들이 3월 15일 낮부터 은밀히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각 마을 단위로 앞산 또는 뒷산에서 횃불을 놓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계몽하였다. 그리하여 3월 15일 저녁 진천읍과 그 주변의 걸미산·돌고개·도당산·문안산·봉화산 산마루에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분산하여 횃불을 놓으며 봉화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때 천도교도 박주철이 봉화 시위 도중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며칠 뒤 7적 조중응의 종제인 조중우의 교섭으로 석방된 이상직과 광혜원면의 윤병한(尹炳漢) 등은 지난 3월 15일의 만세시위운동이 계획적으로 거행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재차 극비리에 각 읍면 동지들과 연락하여 온 군민이 4월 2일 일제히 독립만세시위를 궐기하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성공회 신도인 상경 유학생 홍순복은 서울에서, 박찬희는 청주에서 3·1운동에 참가하고 각기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 진천읍 만세운동
3월 15일 저녁에 진천읍과 그 주변의 봉화산 등 각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리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일 이상직의 지휘 아래 오전 8시에 수천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읍내를 시위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행렬이 일제 헌병대 앞을 통과하려 할 때 야만적인 일제 헌병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1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군중은 더욱 기세를 높여 헌병대를 공격하여 헌병대 창벽과 기물을 파괴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이때 이상직 등 십여 명이 일제 헌병대에 잡혀갔고, 심지어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유순복과 이용달 등 10여 명의 어린 학생들도 잡혀가 고초를 당하였다. 또한 조태경은 헌병대에서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와 그날로 순국하였다.
2. 백곡면 만세운동
4월 2일 저녁 장진호·서정직·허태성·신영희(申英熙) 등이 주동이 되어 350여 명이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갈월리·양백리·용진을 지나 석현리에 와서 밤을 새웠다. 4월 3일 아침 이장 김봉경이 제공한 식사를 하고 신영희의 지휘 아래 진천읍내로 시위행진할 때 도주하던 백곡면장 남기석을 붙잡아 태극기를 들려 앞장세우고 백곡면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분견소장이 애걸하면서 시위를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계속 행진하여 사송리까지 왔다. 이 급보를 듣고 진천 주둔 헌병 8명이 달려와 사송리 모퉁이에서 행진을 저지하고자 총포로 위협하였다. 이에 신영희 등은 맨손으로 달려들어 헌병 한 명과 격투를 벌렸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신영희 등을 총대로 후려치고 난타하고 연속적으로 총포를 발사함으로써 시위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하였다. 이때 체포된 정흥모·서상숙·정성호 등 10여 명은 3주에서 6개월의 구류 또는 옥고 끝에 풀려났으며 신영희는 1년 6개월 만에 풀려났다.
3. 광혜원면 만세운동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진천읍내의 이상직과 광혜원면의 윤병한 등은 4월 2일을 기하여 군내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윤병한은 광혜원면의 동지 정관옥·오은영 등과 상의하여 회죽리 일대의 면유림에 식목 행사를 한다는 명목 하에 이영호 등 동지들을 회죽리 산속으로 집결시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후에 광혜원 장터로 내려오면서 대열을 정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참가한 군중은 정운화·남계홍·백선옥·유치선·김경윤·윤광옥·김득손·김예원·정인옥 등 2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군중의 행렬이 만승면사무소에 이르러서는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한편 면장과 면서기를 구타하고 그들에게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니 같이 시위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또한 인근에 새로 건설 중인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돌과 곡괭이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면사무소를 찾아가 박수문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 20여 매를 등사판으로 인쇄케 하고 밤중에 장터 곳곳에 붙여놓게 하였다.
4월 3일 장날에 윤병한 등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고 만세시위를 벌이니 군중이 2,000여 명이나 참가하였다. 이에 광혜원면 주재 일본 헌병분견소장 니요우에[入江]의 원군 요청으로 달려온 진천 헌병대 10여 명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이치선 등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인사가 부상을 당하였다.
4. 이월면 만세운동
4월 2일 장양리의 만세시위 군중이 이월면 헌병분견소를 습격한 후 송림리 이장 신각희를 방문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신각희는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만세운동을 제지하였다. 오후 10시경에는 송림리뿐만 아니라 중산리·노은리 외에 2~3곳의 동리 사람들이 화톳불을 지르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서 1919년 3월 15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4월 2일 진천군 각 면으로 확산되었고, 군민들의 저항이 격렬하였다. 이에 출동한 일제 헌병대는 평화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십여 명의 순국열사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4월 4일부터는 일제 헌병들이 총출동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수십 명을 검거 투옥하고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순국 독립운동가는 유치선·이치원·김경윤·윤광옥·김득손·김예원·구씨·조태경 등이며 그 밖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순국열사들이 있었다. 옥고를 치른 인사는 이상직·윤병한·정인옥·오은영·정운화·남계홍·박선옥·신달용·이영호 등이고 고문으로 부상당한 인사는 오성옥·박갑섭·임원준·김선일·박광옥·신영희 등 10여 명이다. 현재까지 국가 포상자는 이상직·윤병한·이영호·박승하[청주에서 활동]이다.
[의의와 평가]
1919년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천군민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 운동은 충청북도에서의 3·1만세운동으로는 최초일 뿐만 아니라 봉화 만세시위운동으로서 최초이다. 3·1만세운동은 초기부터 비교적 격렬하였기 때문에 순국 희생자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