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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87
한자 許積
영어음역 Heo Jeok
이칭/별칭 여차(汝車),묵재(默齋),휴옹(休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대신(大臣)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성별
생년 1610년(광해군 2년)연표보기
몰년 1680년(숙종 6)연표보기
본관 양천(陽川)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 활동 흔적이 남아 있는 조선 후기의 고위 문신.

[개설]

조선후기 현종·숙종 대 온건파 남인세력인 탁남(濁南)의 영수로 활약한 고위 문신이다.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여차(汝車)이고,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이다. 허초(許礎)의 증손으로 조부는 허잠(許潛)이고, 아버지는 부사 허한(許僩)이다.

[활동사항]

24세인 1633년(인조 11) 생원·진사시의 양시에 합격하고, 28세인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검열·부수찬을 지내고, 1641년(인조 19)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하였다. 1645년(인조 2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647년(인조 25) 일본 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한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효종 6)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659년(효종 10)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해에 효종이 승하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으로서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2년(현종 3)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64년(현종 5)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에 다시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좌의정에 올랐다. 1671년(현종 12)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설]에 맞서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고, 남인정권을 이끌었다.

뒤이어 예론(禮論)에서 패배한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탁남의 영수가 되어 청남세력을 정권에서 밀어냈다. 1676년(숙종 2) 사은겸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세 번째 다녀왔으며, 뒤이어 5도도체찰사가 되었다. 1678년(숙종 4)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하여 통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숙종의 신임을 받아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할아버지 이잠(李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함부로 사용해 왕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와중에 서자 허견(許堅)의 모역(謀逆)사건이 발생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형벌을 기다리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서인(西人) 김익훈(金益勳)과 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관작을 복구시켰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충성을 다하였으며, 재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왕의 은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白) 등의 인사 부정을 과감히 탄핵해 백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 등과 가까이 지냈다.

허적이 조정에서 권세를 잡고 있을 때 진천의 만승면 금천동에 별장을 지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이 실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허적은 진천군에서의 뚜렷한 활동 사항은 없으나 권세를 잡고 있을 때 진천군의 뛰어난 경치와 더불어 지금의 진천군 광혜원면에 별장을 지어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진천군의 『진천군지』『상산지』에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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