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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753
한자 書堂
영어음역 seodang
영어의미역 village school
이칭/별칭 학당(學堂),사숙(私塾),학방(學房)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명철

[정의]

조선시대에 사설로 운영된 초등교육기관.

[개설]

서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교육기관이지만, 그 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 부락 단위로 운영되는 ‘경당’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에 이르는 동안 각처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서당과 관련된 기록은 1124년(인종 2)에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사신 서장관(書狀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두(書杜)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 자제가 무리를 이루어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하여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講習)하고 아래로 졸오(卒伍), 동치(童稚)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상황을 전해준다.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는 가정에서 초등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정에서 먼저 기초적인 학습능력을 익힌 다음 사설교육기구인 서재(書齋)와 관학인 향교를 통해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특히 서재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했으나 초등교육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세기 후반 들어 서원이 생기면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게 되고, 서재에서 이루어지던 초등교육을 서당이 맡게 되었다. 서당은 처음에는 서원에 부속된 교육기관이었으나 17세기 들어 독자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당에는 8~15세의 양반과 평민층의 자제들이 다녔다.

조선시대의 서당은 비록 사설로 운영되는 초등교육기관이었지만 백성들에게 문자를 보급시켰으며, 예를 갖춘 마을의 풍속을 통해 주민들을 순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서당은 구한말에는 신사상과 민족주의를 보급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서당은 일제에 병합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으며, 그 수가 1만 6,500여 개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가 급감했으며, 해방 후에는 새 교육법에 따라 서당의 기능을 보통학교에 물려주면서 점차 소멸해 갔다.

[진도의 서당]

진도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유배지였으며, 진도에 유배 온 선비들이 적거생활(謫居生活) 중에 서당을 열어 후학을 기르고 지역민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따라서 지역민들은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봉암서원에 모셔진 소재 노수신(盧守愼)은 19년간의 유배생활 중에 박윤학(朴贇鶴)과 같은 대학자를 길러냈다. 이후 의졸 남이성(南二星), 적안 신명규(申命圭), 죽서 이민적(李敏迪), 우파 조태채(趙泰采) 등도 서당 등을 통하여 주민교육에 힘썼다. 또한 조선 순조 때 금갑도에 귀향 온 판서 김이익은 풍속교화에 힘을 써 『순칭록(循稱錄)』을 교과서로 만들었고 진도의 예절을 바로잡았다.

진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당은 노암재(진도군 의신면 칠전리)로 1684년에 세워졌다. 이곳은 옛 건축물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문자는 명확치 않으나 철비(鐵碑)가 지금도 마을 유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이외에도 고군면 향동리·오산리, 군내면 용장리·동산리, 임회면 상만리·죽림리 등에 유수한 서당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진도 사람들은 교육열이 높아 옛날부터 동리마다 ‘학계’를 만들고 전답을 마련하여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학계가 없는 동네에서는 부모는 굶주리며 헐벗더라도 자식만은 꼭 가르치려 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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