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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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致先 |
영어음역 | Sin Chiseo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선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활동한 민속예술인.
[개설]
신치선은 판소리 명인이면서도 진도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던 판소리 선생으로 더 유명하다. 1899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뒤 유년기는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보냈다.
신치선은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한 뒤 판소리의 명인 신영희를 낳았으며,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1남을 더 얻었다. 현재 자녀들은 모두 판소리와 고법 등 국악에 종사하고 있는데, 장남은 거문고를 전공하고 있다.
[활동사항]
신치선은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金正文)[송만갑(宋萬甲)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사사하고,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였다.
1946년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한 뒤에 진도 군민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1948년에는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판소리 강습을 계속하였다. 이때의 제자들이 안득윤(安得潤), 박연수(朴連洙), 박옥수(朴玉洙), 신홍기, 신천행,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에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하였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安得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 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거처를 옮긴 신치선은 안행년(신영희와 더불어 대명창이 됨)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서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가 하면,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순회공연과 만주 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이 악화되어 타계하였다.
[의의와 평가]
당시 진도에서 판소리를 가르치던 명인들은 신치선과 이병기, 김득수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진도의 국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인데, 많은 제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관련 동호인 그룹을 양산하여 진도 국악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