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869 |
---|---|
한자 | 鄭萬朝 |
영어음역 | Jeong Manj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말기 진도로 유배된 학자.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이다. 서울 출신이고 아버지는 정기우(鄭基雨), 할아버지는 정윤용(鄭允容), 증조부는 정동일(鄭東逸)이다. 아들로 정인형(鄭寅衡)이 있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학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생애]
1858년(철종 9)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중추원참의, 조선사편수회 위원, 경성제국대학 강사, 경학원대제학 등을 지냈다. 1936년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884년(고종 21)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門)의 주사가 되었다. 1889년에는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1894년에는 내부참의에 이르렀다.
1896년 4월에는 1895년 8월역변(八月逆變)과 10월무옥(十月誣獄)에 관련하여 일본공사 미우라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경복궁 화재사건에 연루됐다는 무고를 입고, 이완용 등의 모함으로 서주보(徐周輔)·정병조(鄭丙朝)·김경하(金經夏)·이태황(李台璜)·우낙선(禹洛善)·전준기(全晙基)·이범주(李範疇)·홍우덕(洪祐德)·정인흥(鄭寅興)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심문을 받던 중 고종의 특명으로 우낙선과 함께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전라도 진도 금갑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 해 12월에 사면되어 관계(官界)에 복귀하였다.
곧 규장각부제학이 되고, 헌종·철종 양조의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에는 친일적인 경향을 띠어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촉탁,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929년에는 경학원(經學院)의 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明倫學院)의 총재를 겸임하였다. 이왕가실록(李王家實錄)의 실록편찬위원이 되어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사무를 주재하였다.
[학문과 사상]
시문에 남달리 능해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술]
저서로는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의의와 평가]
유배 중에 진도에 글방을 열고 2세 교육에 힘썼으며 진도 땅에 예술과 문화의 씨를 뿌린 개척자로서 진도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소재 노수신과 함께 수많은 진도 유배 인물 중에서 유배 기간이 길었던 관계로 진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만조가 금갑도로 유배된 것을 안 이 고장 출신 문사들과 연소자들이 그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교유한 것이 『은파유필(恩波濡筆)』이라는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진도군수의 청에 의하여 소치(小癡)가 살았던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진도읍 동외리 원동마을에 큰 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때 소년 허백련(許白鍊)도 8살 때 그의 공부방을 찾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에게 글을 배운 사람들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