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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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希顔 |
영어음역 | Kang Huian |
이칭/별칭 | 우경(愚景),경덕(景德),인재(仁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우경(愚景)·경덕(景德), 호는 인재(仁齋).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형이다.
[생애]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41년(세종 23)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으며, 1444년에는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와 함께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였고, 1445년에는 최항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었고 최항·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 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년(단종 2)에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으며,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 이종검(李宗儉)이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전(表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별세하였다. 『진양지(晋陽續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저술]
저서로 원예에 관한 전문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꽃을 가꾸는 일을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작품]
시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안견(安堅)·최경(崔涇) 등과 함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특히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곽희(郭熙), 글씨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 그림으로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산수인물도」·「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