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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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成坤 |
이칭/별칭 | 여승(汝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여승(汝承)이다. 고려 시대 명신인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를 지낸 이경징(李慶徵), 아버지는 통덕랑을 역임한 이인식(李寅烒), 어머니는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딸 여흥 민씨이다. 이성곤은 윤두수의 후손인 해평 윤씨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성곤(李成坤)[1665~1725]은 1700년(숙종 26) 제용감(濟用監)[각종 직물 따위를 진상하고 하사하는 일이나 채색이나 염색, 직조하는 일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봉사(奉事)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후 1701년(숙종 27년) 군자감(軍資監)[군수품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직장(直長), 이듬해에 의영 주부(義盈主簿), 의금부(義禁府)[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 하던 관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고, 그 해 5월 황간 현감(黃澗縣監)을 역임하였다. 1702년(숙종 29) 차사원(差使員)[임금이 중요한 임무를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벼슬]에 오르고, 1708년(숙종 3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왕세자(王世子)를 호위하던 관청]의 사어(司禦), 이듬해에 의흥 현감(義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곧 하직하였다. 1713년(숙종 39) 해주 판관(海州判官), 1716년(숙종 42) 부사과(副司果), 1720년(숙종 46) 평시령(平市令), 1721년(경종 즉위년)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되었다.
이성곤은 가평 군수로 재직 중이던 1722년(경종 2) 9월 29일 제225대 인천 부사에 제수되어 1724년(경종 4) 2월 14일 병으로 교체될 때까지 29개월간 재직하였다. 재직 중 이성곤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723년(경종 3) 5월 중국에서 온 칙사(勅使)가 홍제원(弘濟院)[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들이 서울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묵던 공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에 머물 때 대령하지 않은 이성곤에 대해 벼슬아치의 죄과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엄중하게 캐물어서 밝히는 종중추고(從重推考)를 하라는 비변사(備邊司)의 계(啓)[관청이나 벼슬아치가 임금에게 올리는 말]가 있었다. 또한 1923년(경종 4) 4월 영종진(永宗鎭)에 소속된 수군 중 도망하고 사망하였거나 자질구레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조사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문초하라는 비변사의 장계가 있었다.
1725년(영조 원년) 4월 1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성곤은 의흥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11년(숙종 37)에 박세채(朴世采)를 도와 관례의(冠禮儀), 혼례의(昏禮儀), 제례의(祭禮儀) 등 삼례(三禮)의 대강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해설하고 고금의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쓴 『삼례의(三禮儀)』를 간행하였다.
[묘소]
이성곤의 묘소는 황해도 금천군 도리촌(桃李村)에 있다. 선조인 이제현의 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인 해평 윤씨를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에는 이성곤의 사위인 박사백(朴師伯)이 기록한 묘지명(墓誌銘)이 소장되어 있다. 청화 백자로 제작된 이성곤의 묘지는 모두 6판으로 구성되었고, 별도의 판에 제목을 ‘조선 인천부사 이공성곤묘(朝鮮仁川府使李公成坤墓)’라 하고 그 밑에 숙인 해평 윤씨를 곁에 묻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판부터 이름, 자, 본관,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 어머니, 성품, 생장, 학문 수업, 관직 등을 기록하였으며, 생몰년과 함께 장지와 합장 여부를 기록하였다. 최근 일본인 다카하시 미코토[高橋眞]는 청화 백자 4매로 구성된 이성곤의 부인 해평 윤씨의 묘지명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