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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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億 |
이칭/별칭 | 중소(仲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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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진주(晋州) |
대표관직 | 사간원 정언|수공조정랑(守工曹正郞)|『중종실록(中宗實錄)』찬수관(纂修官)|인천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498년 - 강억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34년 - 강억 식년시 생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강억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강억 사간원 정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50년 - 강억 『중종실록』 찬수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강억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57년 - 강억 성균관 사성 역임 |
출생지 | 강억 출생지 - 경기도 안산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강억 묘소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는 중소(仲邵)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을 지낸 강징(姜澂), 할아버지는 강이행(姜利行), 증조할아버지는 강안복(姜安福), 어머니는 연일 정씨로 정미(鄭湄)의 딸이며 처는 유응대(柳應臺)의 딸이다.
[활동 사항]
강억(姜億)[1498~?]은 1498년(연산군 4)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나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 합격하고, 1544년(중종 39)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에 집의 김개(金鎧), 사간 이영현(李英賢), 장령 정유(鄭裕)·유강(兪絳), 지평 한지원(韓智源)·윤옥(尹玉), 헌납 정종영(鄭宗榮), 정언 정사량(鄭思亮)과 함께 사림(士林)을 해치고자 하였던 황헌(黃憲)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하고 귀양 보낼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또, 9월에는 경연(經筵)에서 “민간의 질고(疾苦)는 위에 다 진달되지 못하는데 승가(僧家)의 일들은 쉽게 진달되고 있다.”라고 언급하여 당시의 승려 보우(普雨)를 비판하였다. 1550년(명종 5) 봉직랑(奉直郞) 수공조정랑(守工曹正郞)에 재직하던 중 『중종실록(中宗實錄)』의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1553년(명종 8)에 인천 부사로 부임하여 1555년(명종 10) 5월까지 재직하고,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으로 옮겨 갔다. 1557년(명종 12)에는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
[묘소]
강억의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에 있다. 묘소 앞에 석재 묘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