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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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大運 |
이칭/별칭 | 시회(時會),석담(石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오현숙 |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도창동인 인천부 전반면(田反面)에 묘소가 있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이다. 아버지는 사어(司禦) 권근중(權謹中), 할아버지는 예조 판서 권협(權悏), 증조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권상(權常)이다. 어머니는 이유혼(李幼渾)의 딸이다.
[활동 사항]
1612년(광해군 4)에 태어난 권대운(權大運)[1612~1699]은 1642년(인조 20)에 진사가 되고, 1649년(인조 27)에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1654년(효종 5)에는 헌납(憲納), 이조 정랑(吏曺正郞)에 이르렀다. 이후 집의, 응교, 사간 등의 청요직을 거쳐 1658년(효종 9)에는 승지(承旨)가 되었다. 1660년(현종 1)에는 노모를 부양하기 위하여 소를 올려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아갔다. 다음해에 형조 참의가 되었고, 좌승지, 한성부 우윤, 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1665년(현종 6)에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내고, 1666년(현종 7)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대사간,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670년(현종 11)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이듬해인 1671년(현종 12)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3년(현종 14)에 형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 예조 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밀려났다가 파직당하고 영일(迎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 해에 유배 중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사되었다. 숙종(肅宗)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려 하자 반대하여 왕이 엄히 꾸짖으니 사직을 청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갑술환국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80세가 넘는 고령임을 이유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1699년(숙종 25)에 향년 88세로 사망하였다. 권대운은 남인으로서 당쟁에 휘말렸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았다. 사후에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묘소]
묘소는 여러 번 이장되었다. 초장되었던 곳은 경기도 부평의 과연리(瓜延里)였다. 후에 인천의 도정곡 임좌 언덕으로 천장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옛 인천부 전반면(田反面) 삼리도두리(三里道頭里)·삼리강창리(三里江倉里) 지역이었던 곳으로 현재 경기도 시흥시 도창동이다. 그러나 위치를 제대로 알고 찾는 이가 드물어 2008년 4월에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동리의 문중 산으로 이장되었다. 권대운의 관직은 높았으나 시호(諡號)와 그를 기리는 사우(祠宇), 행적을 기록한 묘비나 신도비도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