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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36
한자 權盼
이칭/별칭 중명(仲明),폐호(閉戶),길천군(吉川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오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관직 강화 부사|경상도 관찰사|호조 참판|도승지|경기 감사|충청도 관찰사|형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권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 권반 군자감 참봉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권반 별시 문과 급제·호조 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1년연표보기 - 권반 직강·사간원 정언·사간원 헌납·예조 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권반 시강원 필선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권반 홍문관 부교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권반 성균관 직강·홍문관 교리·홍문관 수찬·안주 목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권반 지평·응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권반 강화 부사·공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권반 경상도 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9년연표보기 - 권반 호조 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 권반 함경 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25년연표보기 - 권반 경기 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26년연표보기 - 권반 충청도 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권반 형조 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31년연표보기 - 권반 사망
묘소|단소 권반 묘소 -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정의]

묘소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에 있었던 조선 시대 문신.

[가계]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명(仲明)이고, 호는 폐호(閉戶)다.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화(權和), 할아버지는 권이(權頤), 증조할아버지는 권영(權詠)이다. 어머니는 부정(副正) 윤건(尹健)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송 씨(宋氏) 슬하에서 자랐다. 영의정 윤국형(尹國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활동 사항]

권반(權盼)[1564~1631]은 1564년(명종 19)에 태어나 1594년(선조 27)에 군수품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인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이 되었다. 1595년(선조 28)에는 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지냈다. 그 해에 별시(別試)[조선 시대에 천간(天干)으로 ‘병(丙)’ 자가 든 해, 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보던 임시 과거 시험] 문과에 급제하였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1602년(선조 35)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인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 1603년(선조 36)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敎理), 1604년(선조 37)에는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弘文館副敎理), 홍문관 수찬(弘文館副修撰), 안주 목사(安州牧使) 등 내외의 직을 두루 거쳤다.

권반은 1607년(선조 40)에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어 세자시강원 필선을 겸임하다가 임금의 말이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는 강화 부사(江華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지방을 잘 다스린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1615년(광해군 7)에는 순검사(巡檢使)로서 해안 방어에 힘썼으며, 1616년(광해군 8)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강화 부사가 되었다.

권반은 1619년(광해군 11)에 호조 참판(參判)을 지내고, 1623년(인조 1)에는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직을 사양하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는 경기 감사를 지냈고, 다음해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대동법의 내용을 지방의 인문 지리적 특수성에 따라 조정한 세부 규칙인 상정(詳定)만을 만들어 비치하고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뒤를 이어 부임한 김육(金堉)이 이를 참고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 뒤 권반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628년(인조 6)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형조 판서를 제수받고 처음에는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으나, 직에 나아가서는 직무에 있어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묘소]

권반의 묘소는 조선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문학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쪽으로 아들인 권경(權儆)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권반은 1613년(광해군 5)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지방을 잘 다스린 공으로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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