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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47
한자 金在魯
이칭/별칭 중례(仲禮),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충정(忠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오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풍
대표관직 대사간|충주 목사|호서 안무사|우의정|좌의정|영의정|영춘추관사
출생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 김재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2년 - 김재로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0년 - 김재로 춘당대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김재로 전라도 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22년 - 김재로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문외 출송
활동 시기/일시 1723년연표보기 - 김재로 울산으로 귀양
활동 시기/일시 1724년연표보기 - 김재로 귀양에서 풀려남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김재로 이인좌의 난 수습
활동 시기/일시 1738년 - 김재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신간 『명사』를 얻어옴
부임|활동지 김재로 전라도 관찰사 - 전라북도 전주
부임|활동지 김재로 충주 목사 - 충청북도 충주
유배|이배지 유배지 - 울산광역시
묘소|단소 묘소 -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64-13

[정의]

묘소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 할아버지는 김징(金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극형(金克亨)이다. 어머니는 돈녕도정을 지낸 이몽석(李夢錫)의 딸이다.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이다.

[활동 사항]

김재로(金在魯)[1682~1759]는 1702년(숙종 28)에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1710년(숙종 36)에는 춘당대(春塘臺) 문과에 급제하고, 설서(說書)·검열(檢閱)·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716년(숙종 42)에 부수찬(副修撰)을 지내면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 등이 선현을 무고했다고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1718년(숙종 44)에는 헌납(獻納)·동부승지·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1719년(숙종 45)에 전라도 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 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호조 참의·승지·부제학·이조 참의 등을 거쳐, 다음해에는 대사간 및 병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지내고 개성 유수가 되었다.

1722년(경종 2)에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1723년에 울산으로 귀양을 갔으나, 1724년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풀려나 1725년에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의 유봉휘·이광좌(李光佐) 등 5인을 죄를 내리도록 청하고,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무고 사실을 상소해 사형하게 하였다. 이어 이조 참판·좌빈객(左賓客)·예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727(영조 3)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 목사로 호서(湖西) 안무사(安撫使)를 겸해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 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녕부사 겸 수어사(知敦寧府使兼守禦使)를 지내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實錄都廳) 당상(堂上)을 겸직하여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1년(영조 7)에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는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복관을 상소하여 신원케 했다. 1732년(영조 8)에 세자의 책례도감 제조를 지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영조 13)에는 당파 싸움을 벌여 탕평책을 어긴 죄로 파직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새로 간행된 『명사(明史)』를 얻어왔다.

1740년(영조 16)에 처음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 외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영조 17)에는 신유 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 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은 관직이 추탈되는 반면 노론의 권력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에게 시호가 내려지고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 등에게는 증직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의 복관을 건의하여 신원되게 하였다.

영조 초기에 탕평론을 주장했으나 결국 노론의 영수 구실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 재임 기간 중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해 한천 이혁 절목(翰薦釐革節目) 10조와 과거 의정 절목(科擧議定節目) 8조를 제정하고 왕실의 상복제를 바로잡는 등 치밀하게 정사를 폈다.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고,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의 풍모를 지녔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천의소감 언해(闡義昭鑑諺解)』와 『난여(爛餘)』가 있다. 편저로는 『예기 보주(禮記補註)』·『청풍 김씨 세보(世譜)』·『좌씨집선속(左氏輯選續)』·『금석록(金石錄)』 등이 있다.

[묘소]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 총묘(冢墓)에 인천부 조동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묘소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64-13번지에 있고,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에서 만의골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 산에 청풍 김씨(淸風金氏)의 묘역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위편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숙종(肅宗)의 뜻에 따라 김재로를 기용해 아꼈으며, 손수 쓴 글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奉朝賀)로 1759년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해인 1760년에 기사 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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