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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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鼎鉉 |
이칭/별칭 | 중길(重吉),추곡(楸谷),송림(松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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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관직 | 인천 부사|지중추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591년 - 김정현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김정현 증광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김정현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 김정현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75년 - 김정현 지중추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75년 - 김정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40년 - 김정현 지천 서원에 배향 |
거주|이주지 | 김정현 거주지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송곡리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김정현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
사당|배향지 | 지천 서원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 서원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중길(重吉)이고, 호는 추곡(楸谷), 송림(松林)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순(金峋)이며, 할아버지는 원종공신 김선경(金善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구이다. 어머니는 부호군(副護軍) 한광윤(韓匡胤)의 딸이고, 부인은 나주 정씨로 정언규(丁彦珪)의 딸이다. 아들은 김방(金滂), 김만(金滿), 김관(金灌), 김황(金潢), 김온(金薀), 김한(金漢)이다.
[활동 사항]
김정현(金鼎鉉)[1591~1675]은 1613년(광해군 5)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鄕里)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송곡리에 은둔하였다. 1630년(인조 8) 별시(別試)[조선 시대에 천간(天干)으로 ‘병(丙)’ 자가 든 해, 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보던 임시 과거 시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높은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택하여 계속 다섯 고을을 다니면서 다스렸다.
김정현은 1649년(인조 27)에 인천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사간원(司諫院)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58년(효종 9)에는 강화 경력(江華經歷)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당시 강화 유수(江華留守)였던 민응협(閔應協)이 군향미(軍餉米)를 마음대로 사용한 일로 인하여 민응협과 함께 정배(定配)[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일]되어 음죽(陰竹)[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 유배되었다.
김정현은 어버이가 죽은 뒤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기로계(耆老契)를 만들고 향산(香山)의 옛일[중국 당나라 낙양(洛陽)의 이도방(履道坊)에서 향산 거사 백낙천(白樂天)을 중심으로 칠로(七老)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는데, 후에 136세의 노인 이원석(李元奭)과 95세의 승려 여만(如滿)이 참가하여 향산 구로회(香山九老會)를 이루었다.]을 본받아 유유자적하였다. 후에 조선 시대에 현직(現職)이 없는 당상관들을 속하게 하여 대우하던 관아인 중추부(中樞府)에 노인 우대로 들어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 우윤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에는 대사헌에 의망(擬望)[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삼망(三望)에 후보자로 추천되는 일]되었으나, 고례(古例)에 어긋난다 하여 임명되지 못하였다.
[묘소]
김정현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정현은 1740년(영조 16)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 서원(知川書院)에 배향되었다.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은 안정복이 찬술하였다.